출처 - 동아일보
사랑도 협상이다
《“인생의 8할은 협상이다”
지미 카터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시절 미국 정부의 대(對)테러리스트 협상을 맡으며 세계적인 협상가로 떠오른 허브 코언의 말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 이후 ‘협상’은 우리에게 친숙한 유행어가 됐다.
FTA와 같은 국가 차원의 굵직한 교섭에서만 협상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직장인들의 연봉 교섭,자녀의 진로 선택,결혼,심지어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일까지 세상사가 협상의 연속이다.
협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심리와 처지,전략에 따라 이쪽에서 내놓은 카드가 달라져야 한다. 특히 가족이나 친구와의 협상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좇아서도 안 된다.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지니스 거래는 몇 번 실패해도 만회할 기회가 있다. 하지만 가족과의 협상은 내 인생을 한순간에 파멸시킬 수도 있는 ‘빅 딜(big deal)’이다.”
㈜쌍용 출신으로 30여 년간 각국을 돌며 무역업을 한 밀레코리아의 안규문(56) 대표가 평생에 걸친 ‘가족 협상’에서 얻은 교훈이다.
생활 속 ‘협상의 달인’들은 “남을 속이고 당황하게 만드는 테크닉이 협상의 전부가 아니다”고 입을 모은다.
협상의 본질은 ‘양보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FTA…M&A…연봉협상…결혼계획…우리주변 협상의 모든 것
110여년 전통의 독일 기업인 밀레에서 2005년 외국인 최초로 한국법인 사장이 된 안 대표는 ‘위로부터는 덜 받고 아랫사람들에게는 더 준다’는 연봉 협상 원칙을 갖고 있다.
“본사는 첫 연봉 협상에서 평균 수준의 85% 선에서 연봉을 제시했습니다. 미국식의 치열한 밀고 당기기를 예상했는지 좀 더 올려 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더군요. ‘주는 만큼만 받겠다’고 했더니 오히려 그쪽에서 당황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안 대표도 협상 카드를 내놓았다. 한국 직원들의 임금 인상은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것과 첫해 목표를 달성하면 다음 해에는 평균치에 추가로 인상해 달라고 요구한 것.
결국 첫해 목표를 달성한 그는 추가 연봉 인상뿐 아니라 밀레 본사로 부터 ‘신뢰’라는 무형의 가치를 덤으로 얻었다.
“직원과 연봉 협상을 할 때는 먼저 당사자의 예상치보다 높게 부릅니다. 그러면 업무성과가 확실히 좋아집니다. 설령 그 직원의 능력보다 조금 많은 연봉을 주더라도 그것은 1년간의 작은 손해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일반인이 가장 흔히 접하는 협상은 직장 내의 연봉 협상과 업무와 관련된 협의 등이다. 이런 교섭에서는 실질적인 ‘이익’뿐 아니라 ‘관계’도 유지하는 ‘윈윈’ 전략이 필수다. 때로 잔꾀를 부리다 신뢰를 잃는 사례도 적지 않다.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임원을 상대로 협상론을 교육하는 ‘IGM 협상스쿨’의 김광진 실장은 “직장 내의 크고 작은 협상에서 성공하려면 본인뿐 아니라 상대의 이익과 향후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며 “인간적이고 진실하게 접근한다면 주변 사람도 무조건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 남자 vs 여자… 극적인 반전 활용해 불붙여라
어찌 보면 남녀의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빅 딜’이다. 결혼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기나긴 ‘협상’이 때로는 흥미진진하게, 때로는 지루하게 진행된다.
지난해 10월 결혼한 동갑내기 커플 유정훈 정혜정(30) 씨. 이들은 첫 만남에서 결혼까지 무려 9년간 밀고 당기는 ‘협상’을 했다.
대입 면접시험장에서 처음 만나 마음을 빼앗긴 정훈 씨는 무뚝뚝하게 대하면서도 가끔씩 먹을 것을 챙겨주는 전략으로 나섰다. 함께 길을 걷다가 정훈 씨가 먼저 ‘지금부터 사귀는 거다’라고 하자 혜정 씨는 흔쾌히 ‘예스’라고 답했다.
하지만 5년 뒤 위기가 닥쳤다. 여자는 직장인, 남자는 학생으로 생활환경이 다른 것이 문제였다. 혜정 씨는 정훈 씨가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게 답답했다.
2002년 어느 날 혜정 씨는 폭발했다.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헤어지자’고 말했다. 폭탄선언이자 ‘벼랑 끝 전술’이었다.
“정말 헤어질 생각은 없었어요. 강하게 나가면 바뀔 줄 알았거든요.”(혜정 씨)
조금만 더 튕기다 말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러 번 회사 앞까지 찾아와 설득하던 남자가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정하고 설득하다 지쳤죠.”(정훈 씨)
돌이켜보면 둘의 관계에서 혜정 씨는 정보의 부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당시 정훈 씨 주변에 다른 여자가 맴돌고 있었던 것. 결국 둘은 갈등을 겪다 헤어졌다.
이후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연인을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극적인 반전(反轉)이 이뤄졌다. 혜정 씨의 생일 날 아침 정훈 씨로부터 e메일이 왔다. ‘이 세상에 너를 보내주신 분께 감사해.’ 여자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둘의 서먹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는 중재자가 필요했다. 두 사람은 ‘메신저’의 중재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남자가 취업하자마자 결혼했다. 지금은 임신 8주로 곧 예쁜 아이가 생긴다.
● 부모 vs 자녀… 조심조심 눈높이 맞춰야 말 통한다
기업체 등에서 생활 속의 협상론을 강의하는 ‘PSI컨설팅’의 박승주 실장은 가장 힘든 것이 아이와의 협상이라고 말한다. 당장은 부모의 뜻을 관철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면 결국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아이(중1)와 장기 협상에 돌입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에 푹 빠진 딸은 만화가를 꿈꿉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만화가로 성공할 확률이 현실적으로 낮고 과정 자체도 순탄치 않기 때문에 말리려고 하죠.”
결국 박 씨는 아이에게 만화가가 되는 것을 막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높은 학업 성적이 필요한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진학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홍보대행사 ‘OPQR’의 이용욱(32) 씨와 동갑내기 부인 권오미 씨는 3월 유치원에 들어간 아들의 지나친 편식과 TV 시청 시간 때문에 고민이다. 어린 아들과 대화가 쉽지 않아 어려움을 느끼던 이들이 내린 결론은 ‘눈높이 협상’ 원칙을 지키자는 것. 부부는 TV 시청 시간을 줄이라는 일방적인 설득 대신 아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반드시 보여 주기로 했다. 된장찌개와 야채 등을 싫어하는 아이가 음식을 규칙적으로 먹을 때마다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당근’ 전술도 구사한다.
● 나 vs 타인… 상대 정보 확보해 타이밍 맞춰 GO
생활 속의 협상 중 가장 테크닉이 필요한 분야는 재래시장과 마트 등에서의 거래다.
협상전략을 테스트하기 위해 종종 대형 마트를 찾는 박승주 실장은 일부러 사람이 많거나 영업을 끝내야 하는 시간에 대형 상가를 방문한다.
손님이 많거나 퇴근이 임박하면 판매원의 마음이 급해져 할인 요구에 응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침대 3개를 정상가보다 30% 싸게 샀다.
“처음에는 침대 1개를 사겠다고 했다가 2개, 3개로 물량을 늘리면서 결국 요구하는 할인가에 구입했습니다. 저는 할인을 받았지만 판매원 역시 전체 매출과 이익을 늘렸죠.”
연세대 경영학과 박헌준 교수는 협상론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적은 비용으로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을 과제로 내준다. 학생들은 읍소하기, 친분을 쌓고 사정하기, 외국인 흉내 내기 등 다양한 협상 아이디어를 제출한다.
박 실장은 “협상의 핵심 변수는 시간과 정보, 그리고 힘”이라며 △상대방의 컨디션이 좋거나 아예 지쳤을 때 협상하기 △‘기분이 좋아보인다’고 말하기 △‘이 가격에 달라’고 무조건 요구하는 대신 ‘이 가격에 살 방법이 있느냐’고 묻기 △가격할인을 포기하는 대신 액세서리와 상품 얻기 등을 생활 속 협상의 노하우로 제시했다.
그는 “다양한 테크닉을 이용해 이익을 얻는 것은 중고차 구입이나 부동산 매매처럼 일회성 거래에 적합한 방식”이라며 “가까운 사람과는 자칫 신뢰관계를 손상시킬 위험이 크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살다보면 돈보다는 무형 가치가 우선인 경우가 적지 않다.
“시장 좌판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에게는 협상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훌륭한 협상기술입니다. 할머니로부터 몇 백 원 싸게 사는 경제적 가치를 얻었어도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마음이 생기면 오히려 손해이기 때문입니다.”(IGM 김광진 실장)
협상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고, 얻을 것과 양보할 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 진정한 협상가가 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재미로 보는 나의 협상 스타일
문항마다 마음에 드는 순서대로 A,B,C에 점수를 매겨 주십시오. 각 문항에서 A,B,C의 합은 10이 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1번 문항에서 A 5점,B 4점,C 1점으로 배점하는 식입니다.
5개 문항에 걸쳐 각각 A,B,C 행동타입의 총계를 구해 가장 점수가 높은 유형이 당신의 협상 스타일입니다. 최대와 최소 점수의 차가 8점 이내면 D형에 해당합니다.
1. 이성을 소개받는 자리에서 식당 종업원이 실수로 새로 장만한 옷에 음식물을 쏟았다.
A.계산 전 사장을 불러 보상을 요구한다.
B.계산을 하면서 상황을 설명하고 보상을 요구한다.
C.종업원이 난처해질 것 같아 그냥 계산하고 나간다.
2. 지금 맡은 일도 벅찬 당신에게 상사가 새로운 일을 맡겼다. 일을 마치려면 보름은 야근해야 한다. 당신은 새로운 일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A.상사에게 이번 일을 맡을 수 없다고 말한다.
B.일을 맡을 만한 다른 사람을 찾은 뒤 상사에게 그에게 맡겨야 할 이유를 얘기하며 설득한다.
C.나를 믿고 맡긴 것으로 생각하고 완수한다.
3. 가족과의 저녁 약속을 앞둔 당신.약속시간이 다 됐는데 선물 가게 주인은 할인해 줄 수 없다고 버틴다. 좀 더 시간을 갖고 설득하면 될 것 같다.
A.할인해 주지 않으면 그냥 가겠다고 위협한다.
B.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늦을 것 같아고 말한 뒤 다시 주인을 설득한다.
C.가족과의 약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 주인이 제시한 가격을 받아들인다.
4. 택시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요금이 9700원이라 1만 원짜리 지폐를 줬다.
A.잔돈을 요구한다.
B.내리지 않고 잠시 기다린다.
C.작은 돈이므로 그냥 내린다.
5. 당신의 자녀가 용돈을 올려 준 지 두 달 만에 다시 50%를 인상해 달라고 요구한다. 당신은 현재의 용돈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자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A.“용돈을 두 달 전에 올려 줬고 그 금액이 적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B.“두 달 만에 용돈을 인상해 달라는 것은 좀 심하지 않니.”
C.“용돈이 적은 모양이구나. 용돈을 올려 줘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줄래?”(자료:PSI 컨설팅)
▶‘…나의 협상 스타일’ 테스트 결과보기
유형별 특징과 개선할 점
○ A(돌진형) 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승리해야 만족하는 스타일. 설득력이 최대 강점이며 주관이 뚜렷해 매사에 자신감이 있다.
▷개선점=상대의 설명을 차분히 듣고 인정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제안이나 설득보다는 질문을 통해 상대의 생각과 상대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면서 협상에 임할 필요가 있다.
○ B(분석형) 협상에 임할 때 정보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논리적인 협상을 전개한다. 또 상대의 행동을 미리 계산하고 대처할 방안을 준비하기 때문에 능수능란한 협상을 한다.
▷개선점=치밀하지만 결론이 느리고 세부적인 일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작은 것은 포기하고 큰 것을 얻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너무 많은 정보와 논리는 상대를 질리게 한다.
○ C(선비형) 상대로부터 호감을 얻으며 협상의 결과로 관계를 취하는 형이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사람 좋다’는 말을 자주 듣고 양보를 통해 희생적인 사람으로 인식된다.
▷개선점=적극적으로 얻지 못하고 양보를 많이 해 ‘무르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또 이런 스타일 때문에 이용당하기도 한다. 협상에 임할 때 관계보다는 실익의 비중을 좀 더 높일 필요가 있다.
○ D(변신형)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유형. 융통성을 발휘해 상대와의 관계를 부드럽게 형성하며 유머가 넘치는 스타일이다.
▷개선점=가끔 스타일의 잦은 변화로 주위를 혼란스럽게 한다. 상대는 변신형을 일관성이 없거나 너무 쉽게 생각을 바꾸는 주관없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협상의 본론에 좀 더 충실하고 인간적인 면 못지않게 일관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료:PSI 컨설팅)
글=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인질범과의 협상…직접 대면은 최악의 상황▼
지난해 개봉된 영화 ‘인사이드 맨’(사진).
미국 뉴욕 월 스트리트에 있는 한 은행이 무장괴한에 의해 점거되고 50여 명이 인질로 잡힌다. 유능한 협상전문 경찰인 프레지어(덴절 워싱턴)는 완전 범죄를 꿈꾸는 영리한 인질범(클라이브 오웬)과 치열한 두뇌게임을 벌인다. 경찰청 대테러센터 관계자는 “최근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묻지마’ 유형의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며 “영화 속의 장면이 아직 낯설지만 우리와 전혀 무관한 상황도 아니다”고 말했다. 일선 경찰을 상대로 ‘위기협상’ 기법을 가르치는 경찰대 행정학과 이웅혁(범죄학 박사) 교수가 위기협상의 ABC를 소개했다.
인질극이나 테러상황이 발생하면 현장에 협상전담 팀과 무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전술 팀이 배치된다. 협상 팀은 협상 전문가와 보조 협상가, 통신 등 각종 설비를 담당하는 기술 스태프, 정보를 수집하거나 제공하는 정보 분석가, 기록요원 등으로 구성된다.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것은 ‘적극적 청취기법’이다. 이 과정에서는 시간을 끌면서 인질범을 차분하게 만들고, 사건 해결을 위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다. 인질범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다.
초기 단계가 지나면 ‘위기 개입’ 단계에 들어간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질범의 감정 상태는 분노에서 절망적인 우울증세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통계적으로 24∼48시간 안에 사건이 해결돼야 한다.
본격적인 협상의 시작은 범인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시점이다. 인질범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 방식을 취한다. 만약 인질범이 10억 원의 현금과 운송 수단을 요구한다면 현재 여건을 설명하면서 요구 수준을 낮춘다. 그 대신 일부 요구를 들어 주는 대가로 인질 가운데 여성 노약자 어린이 등 일부 그룹을 석방시켜야 한다.
제3자 중재 기법도 있다. 여기서 중재인이란 인질범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다. 투입 시기는 인질범의 감정이 비교적 순화된 상태에서 협상 팀이 핵심 정보를 충분히 파악한 뒤다.
협상 전문가와 인질범이 1 대 1로 직접 만나는 영화의 장면은 최악의 상황이다. 직접 대면은 불가피할 때 시도하는 최후의 방법이다. 안전을 사전에 보장받은 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해야 한다. 항상 탈출 경로를 사전에 확보해야 하며 협상 전문가가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참 어려운 연애방정식… 수학공부 하듯?
《‘매니큐어를 바르며 시간을 보낼지언정 전화하고 싶은 욕구를 참아라.’
‘상대방에게 문자가 오면 적어도 15분이 지난 후에 답장을 보내라.’
연인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며 휴대전화가 닳도록 만지작거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배신감을 느낄 만한 얘기들이다.
하지만 새봄 서점가를 점령한 각종 사랑 지침서에는 이런 연애 지침을 실은 전략이 난무한다.
‘연애의 정석’ ‘연애 참고서’ ‘실용연애전서’ ‘연애feel살기’….
제목만 봐서는 연애 수험서인지 지침서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전서’니 ‘필살기’니 하는 제목들이 긴장감마저 감돌게 한다. 모든 책들이 ‘살아 있다면 사랑해’라고 외치는 듯하다.》
지금은 연애시대 <상> 쏟아지는 연애지침서
요즘 쏟아져 나오는 연애 지침서들은 종류도 다양하다. 판매 실적도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지난 한 해 출시된 사랑 연애 관련 도서만 해도 70여 종이며 판매 실적도 2005년에 비해 20% 이상 신장했다”고 전했다.
이유는 뭘까. 물론 수요자가 많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연애 하면 20대의 전유물이었지만 요즘은 다르다. 전 연령대에서 연애가 가능한 시대라고 할까. 만혼 이혼 재혼 독신 등 사람마다 혼인과 관련한 삶의 형태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평균수명 연장이 ‘한 사람과의 사랑’만 가능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며 감성 연애 사이트를 표방하고 있는 ‘더 토크’를 운영 중인 문기헌 대표는 “30대 후반과 40대 초반이 전체 회원의 20%”라고 전한다.
지침서가 난무하는 두 번째 이유는 연애하는 데도 ‘지침’을 찾는 현대인의 심리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즉 인간관계를 기계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연애조차 요리처럼 레시피(조리법)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사회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기존에 당연하게 믿어 왔던 규범이나 가치가 무너졌다고 믿을 때 사람들은 불편하고 어려운 현실을 헤쳐 나가기보다 현실을 벗어나 외부에서 문제 해결 모델을 찾게 된다”며 “레시피대로 요리하면 최소한 실패는 하지 않듯 연애도 바람직해 보이거나 멋있어 보이는 사람이 성공한 방법대로 하면 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일어나게 된다”고 분석한다.
본래 연애라는 것은 개개인의 관계의 속성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는 아주 사적인 영역이다. 한마디로 딱 잘라 이야기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중에 나와 있는 각종 연애 지침서들은 레시피 같은 일정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원칙이라는 것은 크게 △연애도 일종의 게임이고 게임에서 이기려면 느긋하게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사랑에 빠지긴 쉽지만 사랑을 유지하려면 전략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로 나뉜다. 즉 ‘사랑받고 싶다면 머리를 굴리라’는 것이다.
듀오 커플 매니저 이명길(‘연애feel살기’ 저자) 씨는 “연애도 낭만에서 실리로 변하면서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전략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며 “요즘 젊은이들은 연애도 토플 공부하듯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어 연애 지침서를 찾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애전략서를 읽고 난 후에야 남자 친구와 헤어진 원인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는 회사원 신모(28) 씨는 “순수파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그 표현 방법에 따라 꽃이 될 수도, 가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방법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연 연애 지침서는 도움이 될까.
대학생 김모(25·서울 송파구 방이동) 씨는 “결국엔 모두 연애라는 게임에서 결코 손해 보지 않겠다는 전략들 같다”며 “사랑은 깨지고 상처받고 그래서 아프더라도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연애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성균관대에서 ‘사랑의 심리’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고 있는 김금미 교수는 “핵가족,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관계를 유지해 가는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젊은 세대에게 ‘연애’는 하나의 도전 과제가 되고 있다”며 “성격도, 사랑하는 스타일도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지침서대로 적용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고 충고했다.
연애 지침서들은 그야말로 한 사람의 경험이고 생각이기 때문에 불변의 원칙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연애의 다양성 중 하나를 간접 경험하는 것쯤으로 여기라는 것이 그의 주문이다.
박완정 사외기자 tyra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