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 헤겔에서 홉스봄까지 -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은 누가 만들었나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의 성립
 
  유럽중심주의적 생각은 역사학뿐 아니라 대부분의 근대 유럽 학문에서 나타난다. 이들 학문이 18세기나, 또 유럽의 우월이 확실해진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강력한 모습을 갖고, 또 체계적으로 나타나는 분야가 역사학이다. 유럽 사람들이 유럽문명의 창조성과 독특성을 주로 역사학을 통해 보여 주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관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앞에서 말했지만 18세기부터 유럽에서 발전한 진보와 문명이라는 개념이다. 진보는 인간의 지적이거나 물질적인 능력이 커지며 인간의 역사는 무한히 발전하여 세상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17, 18세기에 유럽이 이룬 커다란 정신적, 물질적인 성장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문명은 진보의 결과로서 당시 유럽인이 이룬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문화를 말한다. 그러니까 진보와 문명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셈이다. 이리하여 서양인에 의해 19세기에 널리 받아들여진 역사관이 진보사관이다.
 
  결과적으로 진보를 대표하는 유럽의 역사는 유럽 지역의 역사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를 중심에서 이끌어가는 보편사의 지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비유럽 세계의 역사는 유럽인에 의해 발견되거나 정복됨으로써만 역사의 주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 진보사관이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세계의 역학 관계 변화이다. 17, 18세기만 해도 인도나 중국은 강력한 힘을 갖는 아시아의 대제국으로 유럽 국가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쇠퇴한 반면 유럽 국가들의 힘이 산업혁명으로 급격히 커지며 상황이 달라졌다. 인도는 1757년의 플라시 전투로 벵골 지방을 빼앗기며 점차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중국도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유럽인들이 아시아의 대제국들에 대해 갖고 있던 존경심이나 동경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아시아에 대한 경멸적인 고정관념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유럽이 우월한 이유
 
  따라서 19세기 이후의 서양 역사학에서는 유럽이 이룩한 성과를 설명하고 비유럽 지역에서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 인종주의, 환경, 문화 등 여러 가지 설명 방식이 동원되었다.
 
  유럽인들은 그들만이 진정한 신인 여호와 신을 믿고 있고 그 신이 유럽인들의 역사를 진보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적 원리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하며 더 윤리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9세기 초에 특히 널리 믿어진 주장이나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인종주의적인 설명은 인종에 따라 사람의 능력에는 우열이 있다는 관점에서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는 18세기 후반에 인종주의가 이론화하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백인종은 황인종이나 흑인종에 비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우월한 자질을 유전적으로 갖고 있고 따라서 더 우월한 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식의 주장을 공공연하게 할 수 없는 분위기이지만 그래도 서양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결부하는 설명 방식은 역사가 매우 오랜 것이다. 그리스의 자연을 찬양한 헤로도토스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을 근대의 유럽인들이 빌려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의 토질이 특히 비옥하다든가, 기후가 따뜻해 농사짓기에 좋다든가 비가 계속 적당히 내린다든가 자연재해가 적고 질병도 적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한다.
 
  문화적 설명방식은 유럽인의 문화적 창조능력을 특히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오랜 옛날부터 독특하게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사유재산제나 자본주의, 자유로운 도시의 발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 개인주의, 민주주의는 모두 그 창조성의 산물로 생각된다.
 
  이런 주장들은 많은 경우 사실과 맞지 않기도 하지만 역사의 설명방식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종교나 인종과 결부시키는 설명은 오늘날 거의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유럽의 자연환경이 특별히 좋다는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다. 또 유럽인의 문화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는 주장도 독단적인 주장으로 증명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런 주장들은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매우 잘못된 편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은 누가 만들었나
 
  헤겔과 '자유'로서의 역사
 
  그러면 먼저 유럽중심적인 역사가 서양 역사가들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간단히 살펴보자. 19세기 사람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독일의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헤겔과 사회주의 이념의 창시자인 칼 맑스, 역시 독일의 사회학자이자인 막스 베버이다. 베버는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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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드리히 헤겔

  프리드리히 헤겔 (F..Hegel, 1770 - 1831)은 독일의 유명한 관념론 철학자이지만 <역사철학>이라는 책을 써서 19세기 사람들이 역사를 보는 눈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는 그 책에서 역사의 진보가 어떻게 근대 유럽에 와서 그 가장 꼭대기에 도달했는가를 보여주려 했다.
 
  그의 역사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자유이다. 그에게 자유란 사람이 생각하는 힘인 이성을 통해 자연이 주는 한계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세계사란 자유라는 이념이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유가 고대 세계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확대되어 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는 인간이 세계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라는 정신적인 작용이 스스로를 그렇게 발전시켜 나간다고 믿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래서 그를 관념철학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발전 단계를 셋으로 나누었다. 오리엔트 세계, 그리스 · 로마 세계, 게르만적 세계가 그것이다. 오리엔트 세계가 가장 낮은 단계에 있고 그리스 · 로마세계가 그것을 넘어선 다음 단계이고 게르만 세계가 그것을 넘어선 가장 높은 단계라는 것이다. 그는 그 가운데 오리엔트 세계, 즉 동양 세계는 고대나 현대나 별 차이 없는 상태에 있다고 믿었다. 즉 그 문화가 정체되어 있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이성과 자유를 스스로 실현시켜 나아가는 세계사는 자연히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사의 전체적인 흐름인 '보편사'의 운동은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나 서쪽으로 움직여 마침내 유럽이 그 절대적인 종착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칼 맑스와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칼 맑스(K.Marx : 1818-1883)는 사회주의 사상을 만들어냄으로써 19세기 후반 이후 세계사의 움직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최근에 러시아나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체제들이 무너질 때까지도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억압받는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해 평생 학문적, 실천적인 노력을 쏟았고 그래서 그의 사상에서 인류애적인 요소는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서 비유럽이 차지하는 역할은 그런 것과는 전연 관계가 없다. 그가 자신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자본주의인데 자본주의는 유럽에서만 발전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 발전을 사회에서 생산이 이루어지게 하는 방식인 생산양식에 따라 원시공동체 사회, 고대노예제 사회, 중세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로 구분했고 한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 생산양식 내부의 모순에 의해서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는 봉건 사회라는, 유럽에서 나타난 생산양식 자체 내의 모순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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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맑스

  반면 아시아의 생산양식은 고대노예제 생산양식의 변종인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다. 아시아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고대적인 생산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체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봉건적 생산양식을 경험하지 못한 아시아는 자본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아예 갖고 있지 않은 셈이다.
 
  맑스는 이렇게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유럽의 경험에 의존하여 역사의 발전 단계를 구성하고 그것을 비유럽지역에도 적용했다. 그러니 유럽의 경험과 다른 아시아 등 다른 지역은 보편적인 역사과정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 절하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그의 정신적 스승인 헤겔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막스 베버와 합리성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막스 베버( 1864 - 1920)는 약 한 세기 전에 활동한 사람이지만 지금까지도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그것은 그가 출중한 능력을 갖고 많은 훌륭한 학문적 업적을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다. 그가 대표적인 유럽중심주의적 이론가의 한 사람으로서 서양인들에게 큰 우월감과 자부심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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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베버

  사실 그가 평생토록 한 학문적 작업은 왜 유럽에서는 진보와 근대화가 가능했고 비유럽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종교, 봉건제, 도시, 관료제, 법제도, 국가형태, 자본주의 등 온갖 주제를 통해 증명하려 했다.
 
  이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개념이 합리성이다. 유럽에는 합리성이 있어 그것이 가능했고 비유럽에는 그것이 없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유럽의 합리성과 비유럽의 비합리성, 전통성을 대비시켜 비유럽 세계의 후진성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는 유럽은 이런 합리적 경향을 고대 그리스로부터 발전시켜 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럽인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만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믿은 프로테스탄트(신교파)윤리와 결합시켰다.
 
  즉 열심히 일하고 낭비하지 않고 돈을 모으려는 프로테스탄트들의 합리적인 태도에 의해 자본 축적이 가능했고 그것을 이익이 남는 건전하고 윤리적인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이런 합리성에 의해 그는 서양에서만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를 갖는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고 서양에서만 과학이 발전했으며 체계적인 신학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반면 비유럽세계에서는 이런 합리적인 태도가 불가능했다. 아시아 사람들만 하더라도 그들은 고대로부터 초월적인 종교나 미신에 빠져서 스스로의 자신을 의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과 외부 세계를 나누어 구분하는 자의식(自意識)이 없으니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고 따라서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시아는 서양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주장이 온통 유럽문명에 대한 찬양으로 뒤덮여 있으나 그런 주장들이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주장들의 많은 부분이 비유럽세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 무지, 편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역사가들
 
  이런 태도는 20세기 후반의 역사가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페르낭 브로델은 프랑스에서 사회경제사를 주로 연구하는 '아날학파'라고 하는 유명한 역사학파의 대표적인 역사가이다. 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서양 역사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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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낭 브로델

  그러나 비유럽 세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19세기 사람들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는 아시아 문화가 너무나 고대적이고 어디에서나 꼭 같다고 말함으로써 헤겔적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또 중세도시가 자유로웠다는 베버의 주장, 르네상스를 근대적인 시기로 보는 부르크하르트의 주장 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근대적인 유럽과 전근대적인 아시아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아시아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조르즈 르페브르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기존 해석의 대표적인 역사가이다. 맑스주의자인 그는 프랑스 혁명을 계급투쟁으로 보아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계급을 타도하고 부르주아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았다.
 
  부르주아 혁명으로 왕의 전제가 무너지고 민주적인 질서가 수립될 수 있게 되었고 봉건적인 신분제도가 파괴되며 모든 사람들이 법 앞에서 평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또 중상주의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를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었고 합리적인 근대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가 전 세계를 일주했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한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근대사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전형적인 유럽중심주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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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1917 ~ ),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역사가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가의 한 사람인 에릭 홉스봄은 최근 민족주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민족주의의 주류적 해석이라고 할 '근대주의적 해석'의 주도 인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민족이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고 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민족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적 정체성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며 쉽게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많은 민족주의는 반동적인 지배계급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시킨 것이므로 관제민족주의의 성격이 강하고 따라서 억압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제 지구화 시대에 들어섰으므로 민족과 민족주의는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민족이 전근대 역사 속에서 발전해온 과정을 경시한다. 또 민족주의가 내부적 요인이 아니라 국가 사이의 경쟁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발전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더 나아가 민족주의가 선진국의 억압에 저항하는 힘으로서 제3세계인들에게 아직도 큰 도덕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전형적인 유럽중심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만이 아니다. 그 정도는 다르지만 서양 역사가들의 거의 대부분이 알게 모르게 유럽중심적인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사람들이 쓴 역사책에서 이런 점들을 주의하지 않으면 문제가 많이 생긴다. 그들의 잘못된 주장에 세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역사가들이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이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지, 그들의 주장 가운데 혹시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지나 않은지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0-23 오전 12:48:30

 

<1>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해악 -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연재를 시작하며
 
  오늘날 우리가 보고 배우는 서양사나 세계사는 유럽중심적 시각에 의해 크게 왜곡되어 있다. 유럽 내지 북미지역을 포함하는 서양 세계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은 탁월한 문명을 발전시킨 우월한 지역으로, 비서양 세계는 야만적이고 정체된 지역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서양의 우월이라는 것은 19세기, 정확히는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의 일이고 그 전까지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양인들은 근대에 있어서의 유럽의 우월을 고대까지 소급시키려는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다. 서양은 그리스시대부터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뛰어난 문명을 이루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계사라는 것이 왜곡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이렇게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야 우리가 세계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고 서양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미국에 대해 정신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것도 모두 이런 상황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철구 교수의 '한국인의 정신을 깨우는 세계사 다시 읽기'는 그런 점에서 우리의 학문적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다. 그는 약 10년간 서양사와 세계사를 우리 눈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으며 이 연재물은 그 성과의 일부이다. 이와 관련된 강 교수의 책으로는 <역사와 이데올로기 1, 용의 숲, 2004>가 있다.
 
  이 시리즈는 매주 2회(화, 목요일) 게재된다. <편집자>
 
 
필자 약력
 
  1979-1988: 청주사범대학(현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89-현재 : 이화여대 인문대 사학전공 교수
  민족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계간 <민족현실> 발행인 역임
  현 민족미래연구소 이사장
 
 
1. 세계사를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을까
 
  1)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역사'의 쓸모 있음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끊임없이 역사와 접하기 때문이다.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지만 TV나 영화에서의 사극이나 역사 다큐멘터리, 나아가 어른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까지도 모두 역사의 일부이다.
 
  역사소설도 마찬가지이다. 다빈치 코드 같은 베스트셀러 소설책도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었지만 예수의 성배 전설을 현실로 끌고 온 일종의 역사소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에 매우 친숙하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전문 역사가는 아니지만 큰 열정을 가지고 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단군이나 고구려 등 우리 고대사를 공부하고 책을 펴내는 적지 않은 수의 아마추어 역사학자들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일반인 수준에서는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역사 '읽기'나 '공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학'을 이야기하려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지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E. H.카의 널리 알려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기도 하고 그 책에 나오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되뇌며 자신의 역사 지식을 과시하기도 한다. 역사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역사는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온 오랜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인간과 그 사회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수천 년 전의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차이가 없으므로 옛날 사람들의 행적을 살펴 오늘날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사마천의 <사기>, 서양에서는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나온 후 수많은 역사책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정치가나 군인들, 학자와 지식인들, 또 공부하는 학생들의 필독서가 된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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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한대의 대표적인 역사가로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

  역사의 이런 유용성은 특히 역사학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성격에서 비롯된다. 역사적 사실은 항상 언제, 어디서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된다. 이렇게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의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를 다루기 때문에 그 지식이 다른 학문의 경우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현실적인 유용성을 갖는 것이다.
 
  근대 역사학과 객관성
 
  이렇게 역사가 유용한 지식이기는 하나 그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는 전제 위에서이다. 정확한 사실 위에 서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구에 바탕을 둔 소설이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역사의 진실성 문제가 나온다. 역사는 어떻게 진실성을 갖게 될까?
 
  서양 사람들도 18세기까지는 역사를 단순히 실용적인 학문으로 생각했으므로 과거에 일어난 일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책에는 사실과 역사가의 상상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사정이 바뀌는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서양학문들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객관성을 중시하게 되는데 역사학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역사학에서 그 일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는 독일사람 레오폴트 랑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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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케 (Ranke, Leopold von), (1795~1886), 근대 역사학을 처음 시작한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역사가

  그는 역사를 쓸 때 역사가의 상상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엄격한 기준에 의해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역사 연구란 '그것이 원래 어떠했던가'를 밝히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 그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를 쓰기 위한 재료인 사료를 잘 다루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옛날 문서나 책, 비석, 고고학적 유물 등 사료들을 아무렇게나 이용해서는 안 되고 쓸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엄격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료 가운데에는 쓸모없는 것도 많고 또 의도적으로 날조된 것들도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랑케의 이런 태도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가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역사가들이 랑케를 본받으며 19세기 말에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역사학이 근대적인 객관적 학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20세기에 들어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학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이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자연과학과 같이 역사학도 보편적인 과학적 원리에 따른 학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역사 쓰기와 객관성의 한계
 
  그러면 객관적인 역사 쓰기는 정말 가능할까? 엄격하게 말해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행히도 인간이 한 모든 일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일부만이 요행히 살아남을 뿐이다. 이는 개인들이 일기를 써 놓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한 일들을 거의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남아 있는 사료 가운데에는 일부러 남긴 것들이 있다. 어떤 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치적을 비석에 새겨두는 경우가 그것이다. 반면 무덤 속에서 발견되는 여러 부장품들과 같이 후세에 남기려고 한 것은 아니나 우연히 남은 것도 있다. 또 옛날 책이나 문서들도 좋은 사료가 된다. 역사가는 남아 있는 이 사료들을 가지고 과거에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일을 다시 엮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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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역사책으로 쓰인 것이나 오늘날에는 훌륭한 사료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역사가의 사관(史觀)이다. 사관이란 말 그대로 역사를 보는 눈이다. 사관은 처음 사료를 골라내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해석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전체 과정에 간여한다.
  사료가 너무 많으면 그것을 다 이용할 수 없으니까 그 가운데 필요한 것만을 골라내야 한다. 이때 무엇을 골라낼까를 결정하는 데 사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그 사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데도 영향을 준다. 심한 경우에는 같은 사료를 놓고도 사관의 차이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사관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개인의 기호나 욕망, 편견, 또 그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등 여러 가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지방색이나 민족의식 같이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영향도 받는다. 현재라는 시점이 주는 영향도 크다. 누구나 현재에 서서 과거를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가가 이런 한계들을 넘어서서 엄격하게 객관적인 역사를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역사를 쓰려고 해도 자신의 편견이나 세계관, 이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해악
 
  이것은 랑케의 경우를 보아도 확실히 알 수 있다. 랑케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고 싶다'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이를 중시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제자들이 독일 역사학을 객관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럼에도 그가 기초를 놓은 독일 역사학은 매우 이데올로기성이 강한 역사학으로 19세기 이후 독일의 발전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이 독일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프러시아의 권위주의적 국가를 받듦으로써 독일인이 배타적인 성격을 갖게 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성이라는 것이 역사를 쓰는 방법상의 문제일 뿐이고 그것이 역사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서술되는 것을 막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독일 역사학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서양의 역사학은 19세기 이래 크고 작은 수많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왔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 등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폭 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인 유럽중심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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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이치케 (Treitschke. Heinrich von )의 초상. 트라이치케는 랑케의 계승자로서 19세기 독일 대표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자이다.

  그것이 다른 이데올로기들을 그 밑에 집어넣든가 함께 결합하며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인들이 유럽이 우월하다고 하는 관점에서 외부 세계를 보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양 사람들이 쓴 많은 서양사나 세계사 책들은 대부분 노골적이든 아니든 유럽중심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는 비서양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심각한 문제이다. 서양만을 중시하며 비서양 세계의 발전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거나 또 서양세계에게 예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비서양 역사가들이 서양 역사가들이 쓴 이런 유럽중심주의적 서양사나 세계사를 객관적인 학문으로 생각하여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양 역사학을 선진 학문으로 생각하는 탓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많은 경우 서양 역사가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들일뿐 아니라 서양 사람들의 유럽중심주의적인 관점을 서양인들보다 더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웃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다. 유럽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세계의 중심이고, 모든 합리적이고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유럽과 미국의 산물이다. 반면 아시아나 아프리카는 고대로부터 문화가 정체되어 온 후진적인 지역으로 근대성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근대에 들어와 서양국가들이 비서양 지역을 식민 지배한 것이나 오늘날의 불평등한 세계질서는 힘의 우열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인식이 객관적인 역사연구의 결과라면 문제 삼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서양사나 세계사의 실제 사실과 상당 부분 맞지 않는다. 또 그것은 상당 부분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그러니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서야 되겠는가? 먼저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잠깐 살펴보자.
 
  2) 유럽중심주의와 그 역사학
 
  '유럽'은 근대의 산물
 
  요사이 유럽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생 때 배낭여행을 갔다 온 사람도 많고 관광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가보지는 않았다 해도 매스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하니 친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럽 하면 그 이미지가 대체로 머리에 떠오른다.
 
  유럽은 지리적으로 보면 서쪽 끝의 섬나라인 영국이나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폴란드와 우랄 산맥까지의 러시아를 포함하고, 남동쪽으로는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들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대륙이다. 그래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지리적 단위로 생각된다.
 
  그러나 유럽은 지리적으로만이 아니라 혈통이나 문화적으로도 크게 하나의 단위로 생각된다. 유럽 사람들이 백인이며, 또 생활양식, 언어, 문화, 종교 등 문화적 면에서 공통된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유럽연합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하나의 단위로 생각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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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유럽

  그러나 우리가 그리는 이런 모습의 '유럽'은 고대에는 있지도 않았다. 그것이 최근 몇 세기 사이, 즉 근대에 들어와서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기원전 7세기부터이나 그리스 시대에 유럽은 그리스 반도 전체이거나 그 일부를 의미했다. 오늘날의 유럽과는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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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의 판도

  로마시대에도 오늘날 유럽의 경계선은 별 의미가 없었다. 로마의 영토가 라인 강 서쪽과 도나우 강 남쪽의 유럽 지역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속하는 북아프리카 해안지역, 이집트, 팔레스타인, 터키 지역까지도 포함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 유럽은 기독교가 믿어지는 지역을 의미했다. 이런 생각은 7세기에 이슬람교가 모하메드에 의해 창시되고 그 후 두 세력권이 경쟁하는 가운데 이슬람 세력권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1세기 이후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에게서 빼앗으려 한 십자군 전쟁 때에 강화되었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권에 속하지만 그리스 정교를 믿는 발칸 반도나 러시아 같은 지역은 카톨릭 지역과는 다른 곳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유럽이라는 말은 15세기까지도 잘 사용되지 않았다.
 
  유럽이 오늘날과 비슷한 지리적 단위로 생각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그 뒤를 이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치열한 종교전쟁으로 하나의 통일된 기독교세계라는 생각이 깨지고 대신 세속적인 가치들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18세기의 계몽사상은 그럼 점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계몽사상가들이 세계를 문화의 발전 단계에 따라 구분하고 유럽을 그 최고인 '문명' 단계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른 지역은 지역마다의 차이는 있으나 '야만'적인 단계에 있었다.
 
  그래서 이제 유럽이 합리성, 근대성, 자유, 진보를 상징하는 문화적 단위로 생각된 반면 비유럽은 비합리성, 야만성, 부자유, 정체(停滯)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프랑스 혁명이나 산업혁명에 의해 증명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유럽'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내용은 절대적으로 근대의 산물이다. 특히 18세기 이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중심주의는 무엇인가
 
  그러면 유럽중심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태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 문명이 모든 비유럽 문명에 비해 독특하고 우월하다는 생각이나 가치관, 나아가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뜻한다.
  유럽이라는 생각이 근대에 만들어졌으니 유럽중심주의도 당연히 근대의 산물이다. 유럽문명이 우월하다는 18세기 사람들의 생각이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전, 그 결과인 비유럽세계의 지배로 현실적으로도 증명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럽문명이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며 인류사 전체가 근대 유럽문명이라는 최고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인 것처럼 생각하는 유럽중심주의적 태도가 자연히 만들어졌다.
 
  그러니 비유럽의 다른 모든 문명들은 근대 유럽문명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사의 통일된 과정에서 각자 부분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비유럽 문명들의 비중도 크게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중심주의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유럽예외주의이고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유럽예외주의는 말 그대로 유럽문명이 특수하고 예외적이라는 주장이다. 유럽 외에 어디에서도 이렇게 합리적이고 진보적이고 근대적인 문명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유럽은 비유럽 세계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 세계사의 예외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많은 역사가들이 유럽예외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며 유럽이 성취한 것을 '유럽의 기적'이니 뭐니 하며 치켜세운다. 중세도시, 산업화, 자본주의의 발전, 민주주의 등등 유럽이 이룩한 것은 모두 '기적' 같은 성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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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드 (Said, Edward W,)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1978)>이라는 책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이와 달리 오리엔탈리즘은 대체로 18세기 이후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세계를 본 독특한 관점을 말한다. 16세기부터 시작되나 특히 식민주의가 본격화된 18세기 이후에, 선교사 · 관리 · 학자 · 상인 · 여행자 등 많은 유럽인들의 생각이나 글이 그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아 세계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모습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현지인들에게서 박해받은 선교사, 식민지를 다스려야 하고 그 행위를 정당화해야 하는 식민지 관리나 어용학자들이 아시아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시아 문명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가치나 독자성, 창조성은 대체로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면 아시아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럽과 비교하여 비합리적이고 낡은, 전통적인 성격만 강조되었다.
 
  결과적으로 유럽은 진보와 문명을 보여주는 반면 아시아는 덜 성숙하고 미개하여 스스로는 발전이 불가능한 곳으로 그려졌다. 그러니 세계사가 당연히 인류의 진보를 대표한다고 믿는 유럽 중심의 것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한국인의 정신을 깨우는 세계사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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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강 우리 눈으로 세계사 보기 ☞ 동영상강의 바로가기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 아버지를 팝니다 ☆


어느 날 신문광고에

아버지를 판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 광고에는 아버지는 지금 노령이고

몸이 편치 않아서 일금 일십만원이면

아버지를 팔겠다고 적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광고를 바라보고

혀를 끌끌차며 "세상이 말세다" 라고

하는 이도 있었고

다 늙은 할아버지를

누가 사겠냐고 숙덕 거렸다.


이 광고를 보고

부모 없는 설움을 지녔던 한 부부가

새벽같이 그곳을 달려갔다.

대문 앞에서 몸매를 가다듬은 부부는

심호흡을 머금고 초인종을 눌렀다.


정원에서 꽃밭에 물을 주고 있던

할아버지가 대문을 열고서는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부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신문광고를 보고 달려왔다고

말씀을 드리자 할아버지는

웃음을 지으며 집안으로 안내를 했다.


그곳은 아주 부잣집이었다.

"아버지를 파시겠다는

광고를 보고 왔습니다."

젊은 부부는 또박또박

뚜렷하게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는 빙긋 웃음을 지으시더니

"내가 잘 아는 할아버지인데

그 할아버지 몸이 좋지 않아요.

그런 할아버지를 왜 사려고......"


젊은 부부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고아처럼 살다 결혼했기 때문에

부모 없는 설움이 늘 가슴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아울러 아프거나 집안이

어렵지 않은 가정이라면

누가 아버지를 팔겠다고

그런 광고를 내겠느냐고....

비록 넉넉하게 살고 있지는 않지만

작은 가운데서도 아기자기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도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싶어서 달려왔다고 했다.


이들 부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돈을 달라고 했다.

젊은 부부는 정성스럽게 가지런히 담은

흰 봉투하나를 할아버지에게 내어놓았다.

할아버지는 돈 봉투를 받아들고 나서

그 할아버지도 정리할 것이 있어서 그러니

일주일 후에 다시 이리 오라고 하였다.


일주일 후 젊은 부부는

다시금 그 집을 찾았다.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어서 오게나 나의 아들과 며느리야"

하시면서 "사실 내가 너희에게 팔렸으니

응당 내가 너희들을 따라가야 하겠지만

너희가 이 집막?

식구 모두를 데리고 오너라~" 고 하신다.


깜짝 놀란 부부는 양자를 데려오면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지만

요즈음 젊은이들이 돈만 알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젊은 부부는

"저희에게 아버지로 팔렸으면

저희를 따라 가셔야지요,

비록 저희들은 넉넉하게 살고 있진 않지만

그곳에는 사랑이 있답니다."

라고 고집했다.


할아버지는 진정 흐뭇한 마음으로

"너희는 참으로 착한 사람들이다.

너희가 부모를 섬기러 왔으니

진정 내 자식들이다.

그러하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곧 너희 것이며 너희는 나로 인해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운 마음 때문에

복을 불러들인 것이다."라고 하시고는

기뻐하시며 자식들의 절을 받았다..

출처 - 다음카페 피사모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작아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라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적게 책을 읽고, 텔레비젼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하고, 사랑은 적게 하며

거짓말은 너무 자주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을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는 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외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세계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시간은 늘어났어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

 

더 빨라진 고속철도, 더 편리한 일회용 물품들

더 많은 광고 전단, 그리고 더 줄어든 양심

 

그리고 사소한것으로 치부해버려서 느끼지 못하는 행복.



< 출처 : 다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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