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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여 간 빈곤 취재에 골몰했다. 특히 청년 빈곤에 주목했다. 대형마트에 취업해 청년 비정규직들과 어울렸고, 영구임대아파트 단칸방에 처박힌 빈곤청년을 만났으며, 학교를 그만두고 거리에서 지내는 학업중단 청소년들을 인터뷰했다. 나는 애초부터 ‘청년’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스무 살이 푸르른 것은 아니다. 거무죽죽한 일상을 겨우 살아내고 있는 10~30대가 있다. 그들을 그냥 ‘푸른 나이’라 부르는 것은 위선이다.
예컨대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80%에 이르고, 모든 취업·실업 정책은 이들 대졸자에 맞춰져 있지만, 아예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나머지 20%에 대해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대학진학률 통계에는 지방대는 물론 전문대·방송통신대 등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이 서울 소재 유명 4년제 대학과 같은 반열에서 취급받는 ‘통계적 기만’을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이보다 더한 ‘통계적 충격’이 있다. 매년 학업을 중단하는 초중고생이 7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평준화와 수월성을 다투는 진보·보수 논쟁과 상관없이 그냥 학교를 그만둬 버린다. 대부분 빈곤층 자녀들이다. 아예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미진학 청소년’ 30만여 명은 따로 통계를 잡아야 하므로, 적어도 40만~50만 명의 청소년이 지금 ‘학교 밖에서’ 서성대고 있다. 그들은 이미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있고, 뒤늦게 마음잡는다 해도 빈곤노동자가 될 것이다(그 궤적을 밟아 이미 ‘청년’이 된 이들 역시 수십만 명이다).
숫자는 절대로 진실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한국의 빈곤율은 약 17% 수준이다. 중위소득 50% 이하일 때 ‘빈자’로 분류되는데, 2인 이상 가구 중위소득이 300만원이고 그 절반이 150만원이므로, 한국 인구의 17%는 월 150만원 미만을 버는 가정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가족의 구성원인 10~30대가 마냥 푸른 시절을 보내고 있겠는가. 이런 숫자를 보고 ‘소외받고 가난한 청년들이 참으로 많다’고 생각한다면, 50점짜리 답이다. 빈곤·노동·교육 관련 통계의 진정한 파장은 따로 있다. 경제적·사회적으로 배척당한 10~30대가 이렇게 많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얼하며 살고 있나? 왜 우리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나?
외국에서 빈곤의 실존은 ‘슬럼’을 통해 입증된다. 슬럼은 수만~수백만 명이 모여 사는 빈곤주거지역이다. 범죄·마약·질병 등의 소굴이다. 일단 빈곤 주거 지역으로 소문나면, 농촌과 외국에서 떠나온 가난한 이들이 모여든다. 한국에는 미국·남미·유럽 등에 현존하는 슬럼이 없다. 슬럼의 초기 모델이었던 ‘달동네’조차 사라졌다. 도시 개발이 이들을 몰아냈다. 60년대 청계천, 80년대 상계동, 90년대 난곡 등을 거치며 빈민촌의 거의 전부를 도시에서 밀어냈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그 효과는 확실하다. 한국인들은 빈곤을 체감하지 못한다. 한 블럭 건너 범죄·마약 소굴이 있는 뉴욕·런던·파리의 부유층과 어딜 가도 연립주택이 들어선 서울의 부유층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인지하는 더듬이가 다르다. 한국에서 빈곤 노동은 ‘투명 노동’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투명한 인간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가난이 없다 치고’ 사는 일에 길들여진 것이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다.
그렇다고 빈자들이 도시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내가 만난 절대 다수의 빈곤 청년은 반지하방·옥탑방·고시원 등에서 살고 있었다. 연립주택이 들어선 도시 곳곳에 이들이 산다. 200만~500만원의 ‘목돈’이 있으면 반지하방을 구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월세만 내는 고시원에 살아야 한다. 다만 고시원·반지하방·옥탑방은 달동네와 다르다.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유대감이 없다. 얇은 벽을 두고 같은 고시원에 살아도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 빈곤 청년은 더 이상 군집을 이루지 않는다. ‘원자화’된 빈곤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동서고금의 혁명 대부분이 슬럼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한국은 확실히 빈곤층에 의한 혁명 가능성을 거세했다.
한국 사회가 달동네만 밀어낸 것은 아니다. 가난한 노동의 공간도 밀어냈다. 그것은 ‘공단’이란 이름으로 수도권 궁벽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공단에 가면 학업중단 청소년, 전문계고 졸업자, 전문대 졸업자 등을 만날 수 있다. 뒤집어 말해, 공단에 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일삼아 공단에 가서 그들을 만나보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먹고 잔다. 이들이 변두리 공단에서 시급 4300원을 감내하는 이유가 있는데, ‘돈 쓸 일은 없고, 오직 일만 하게 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해, 그들은 스스로 고립되어 지낸다. 그리하여 가난한 노동의 공간조차 우리는 보지 않고 산다. 빈곤 청년을 함께 취재했던 후배 기자가 있다. 그는 안산공단 난로공장에서 한 달을 일했다. 그의 가장 큰 불만은 공단을 오가는 버스에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고, 항상 만원이고, 정류장은 공장에서 너무 멀다”고 말했다. 샐러리맨을 실어 나르는 도심 버스의 불편함은 어떻게든 언론과 관청에 ‘감지’된다. 그러나 공단 버스 노선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승객이 많아도 배차 시간은 짧아지지 않고, 정류장 간격이 멀어도 추가하지 않는다. 지하철역이 생기는 일은 절대로 없다. 공단 자체가 중산층의 생활 반경에서 이격된 것이다.
도심 한복판에 들어온 가난한 노동공간이 있긴 하다. 구로디지털공단은 서울 도심에 있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번듯한 빌딩의 밀집지대다. 빈곤을 티내지 않는다. 공단 안에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물론 거기 들어가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전자부품을 만드는 소공장인데, 납을 비롯해 각종 화학약품이 가득한 곳에서 환기·냉난방 시설도 부족한 가운데 20대 청년들이 일하고 있다. 그들이 일하는 모습은 절대로 도시인들에게 보여지지 않는다. 그들의 폐와 혈관에 축적되는 중금속도 절대로 보여지지 않는다. 각종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청년들 역시 도심 곳곳에서 우리와 함께 있긴 하다. 편의점·대형마트·커피전문점·백화점 등에서 일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가난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가난의 표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 서비스업종에서 일하는 모든 청년 노동자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은 빈곤을 탈색시킨다. 백화점 매장을 지키는 아름다운 20대 여성 거의 전부는 시급 4천원짜리 계약직이다. 우리 곁에서 일하는 빈곤 청년은 자신의 가난을 ‘화장’한다. 화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곁에 두지 않는다.
가난이 사라진 시공간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가난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70년대 달동네에선 런닝셔츠 바람으로 연탄을 배달할 수 있었지만, 연립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찬 2000년대 골목에선 실업자도 와이셔츠를 걸친다. 지금 한국에서 가난은 일상에 융해돼버렸다. 그것은 좀체 추출되지 않는다. 우리는 가난이 보이지 않는 시공간에 익숙해져 버렸다. 간혹 가난을 마주쳐도 시선을 돌린다. 가난한 사람을 보지 않고, 그저 통계로 가난을 추상한다. 빈곤 청년은 통계만으로 입증되지 않고, 더구나 체감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들의 상당수가 가난하다면, 그 가난이 대부분 체감되지 않는다면, 그 효과는 간단하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빈곤 청년의 생애사를 추적하면 반드시 그들 부모의 빈곤이 있다. 크게 세 부류가 있다. 70·80년대 시골에서 상경했으나 끝내 중산층에 합류하지 못한 경우,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임금생활자 대열에서 탈락한 경우, 2000년대 카드대란을 전후해 사업(주로 자영업)이 망한 경우 등이다. 그들의 자식 세대가 오늘날 청년 빈곤을 대표한다. 이 대목에 이르러 독재/민주정부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들의 아버지 가운데 일부는 박정희·전두환 때문에 가난해졌고, 또 다른 일부는 김대중·노무현 때문에 가난해졌다. 그들의 아버지는 때로 박정희를 욕하고, 때로 노무현을 욕한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10~30대는 민주 정부를 지지할까, 독재 정부를 그리워할까?
지방으로 내려가면, 청년의 일자리는 대기업 공장에서 비롯한다. 현대·삼성·LG·SK·포스코 등 재벌이 운영하는 각종 제조업 공장들이다. 그런데 이들 공장에선 90년대 후반 이후, 사실상 정규직을 추가로 채용하지 않았다. 대신 사내하청 방식의 용역을 통해 비정규직만 채용했다. 지역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자동차·조선소·제철소에 가보면, 정규직은 40대 이상이고, 30대 이하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서울의 유명대학을 졸업한 소수만 대기업 관리직에 취업한다. 중위권 이하·지방대를 졸업하면, 하청업체 관리직이 될 것이다. 전문대 졸업자는 하청업체 비정규직이 되고, 그보다 못한 학력이라면 노동자들을 상대하는 서비스업 계약직으로 일할 것이다. 물론 고임금을 받는 40대 이상 대공장 정규직에게도 먹여 살릴 식솔이 있긴 하지만, 어쨌건 사용자와 (정규직)노동자는 비정규직 이하로 뻗어나가는 가난의 먹이사슬에 별 신경쓰지 않는다. 이들에게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만난 어느 스물두 살 청년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수억 원짜리 주상복합 아파트를 살 정도로 부유층이었으나,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사업이 망하여 집을 통째로 날렸다. 남은 돈으로 호프집을 시작했으나 카드 대란으로 망해버렸고, 지금은 구청이 제공하는 자활근로로 근근이 먹고 산다. 그런 아버지를 둔 스물두 살 청년은 대학 진학의 꿈을 접은 대신 또래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부부가 함께 도너츠 매장에서 일하는데, 아침 7시에 젊은 엄마가 먼저 출근하면, 아침 9시에 젊은 아빠가 세살·두살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낸 뒤 같은 매장으로 간다. 오후 5시 퇴근길에 젊은 엄마가 아이를 찾아오면, 젊은 아빠는 저녁 11시에 매장 문을 닫고 퇴근한다. 두 사람이 함께 월 200만원 정도 버는데(그래서 일체의 복지혜택에서 제외된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 20만원짜리 지하 단칸방에 살고 있다. 그나마 지금은 사정이 좋은 편이다. 둘째 아이가 태어날 때는 살 집이 없어서 찜질방에서 네 식구가 한 달을 지냈다. 젊은 아빠는 나에게 “잠을 좀 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더 나은 직업을 갖고, 더 나은 집에서 살려면, 교육을 더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부유층·중산층의 자식은 대학원 진학, 공무원 시험, 대기업 취업 등을 위해 2~5년씩 틀어박혀 미래를 준비할 수 있지만, 이들에겐 당장 오늘이 문제다. 오늘의 문제를 누군가 해결해주지 않는 한, 스물두 살짜리 도너츠 매장 직원에게 검정고시·방송통신대·직업교육·인턴취업 등은 모두 말장난에 불과하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청년은 고등학교 진학 무렵부터 가계 부양의 압박을 느낀다. 부모가 이혼했거나(결손 가정에서 ‘결손’이 생기는 이유는 대부분 빈곤에 있다), 실직자이거나, 질병을 앓고 있으므로, 자식들은 돈 버는 일부터 걱정한다. 그들에겐 정말이지 미래를 위해 투자할 단 1년의 여유가 없다.
더 중대한 사태가 진행 중이다. 이들이 속속 결혼하고 있다. 가난하면 불안해지고, 불안하면 자존감이 사라지고, 자존감이 없으면 사태를 강압·폭력으로 해결하려 들고, 그런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은 배신감·고립감을 느낀다. 아이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고, 중산층의 또래보다 더 빨리 더 깊이 사귄다. 이들은 곧잘 20대 초중반에 동거·결혼하여 자식을 낳는데, 2세를 어떻게 돌볼지 배운 바가 없다.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빈곤층으로 전락한 40·50대는 이제 환갑을 넘겨 손자·손녀를 맞고 있다. ‘포스트 1997년 세대’가 3대째 승계되고 있다. 현재 7살 미만의 (가난한) 미취학 아이들은 5~10년 뒤에 정규교육과정에 진입한다. 그 무렵이 되면, 빈곤청년을 넘어 빈곤아동의 문제가 폭발하지 않을까, 나는 두렵다.
서로 고립되어 있음에도 이들이 공유하는 관념 또는 정서가 있다. 이들에겐 공통된 꿈이 있다. “가게를 차리는 것”이다. 빵가게, 호프집, 치킨집 등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임금생활자가 되는 길을 가능성에서 제외한다. 대신 소규모 자영업자가 되는 꿈을 꾼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각종 자영업의 기반은 서비스업의 대형화와 함께 붕괴했다. 그들이 작은 가게의 주인이 되려면, 대형마트·백화점이 망해야 한다. 대형마트와 백화점이 망하면, 그들은 당장 오늘을 먹고살 돈을 벌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종종 “끈기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실제로 그들은 정시에 출근하지 않거나, 너무 쉽게 일을 그만둔다. 성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반쪽짜리다. 그들은 성실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딜 가든 그들은 월급 80만~130만원을 번다. 마트·백화점 등에서 판촉 영업을 하는 스물네 살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고등학교만 졸업했다. “전문대를 나와 사무실에 취직해도 커피·복사 심부름하면서 120만원을 받는다”고 그는 말했다. 착실히 공부하여 착실히 대학을 졸업한 뒤에 착실히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를 그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들은 거리를 헤매는 히치하이커처럼 걸리는 대로 아무 직업이나 갈아탄다.
이들은 투표를 하지 않는다. 투표일에도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일하는 사내하청업체, 공단내 소공장, 백화점, 대형마트 등은 투표일에 쉬지 않는다. 투표일에 이들 업체가 모두 쉰다 해도 그들은 부족한 잠을 자게 될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건 그들은 일체의 정치·사회적 ‘의사표현’에 무관심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당 전체에 무심했다. 언론 또는 노조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인생을 통틀어 정부·정당·노조·언론이 버팀목이 됐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힘 있는 사람’을 믿는다. 세상을 향해 제 의지를 관철하는 다른 인물을 일찍이 접한 적이 없으므로, 이들이 믿고 따르는 ‘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일하는 업체의 사장이다. “우리 사장님은 그래도 착한 분”이라는 말을 취재과정에서 수도 없이 들었다. 자연스레 ‘사장님’의 철학과 신념까지 그대로 수용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경기부양’ 신화다. 빈곤청년은 신문 따위 읽을 생각도 시간도 없다. 이들이 보수화되는 것은 <조선일보> 탓이 아니다. 월급 80만~130만원을 받으려면 가게에 손님이 많아야 되고, 손님이 많아지는 것은 경기가 좋을 때라는 말을 이들은 사장으로부터 매일 듣는다(물론 사장은 그런 신념체계를 <조선일보>에서 배운다).
만약 그들에게 정치의식이 있다면, 보수 정당에게 몰표를 주는 것이 당연하다. 보수 정당은 “경제를 살리겠다”고 공약한다. 선거운동원들은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그 말을 번역한다. 진보 정당은 “복지를 강화하겠다”고 공약한다. 선거 운동원들은 “공평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그 말을 번역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복지와 공평에 대해선 아는 바도 겪은 바도 없다. 경기가 좋아지는 게 무엇인지만 안다. 빈곤청년은 자신에게 떡고물을 나눠줄 힘 있는 자를 인정하고 수용한다. 그들이 큰 떡을 다 먹는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월급 100만원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다면, 사장이 한 달에 수억 원을 번다해도 상관없다. 떡고물을 준다는 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아마 사회보장 또는 복지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국민연금·기초생활보장·국민의료보험·노령연금보험·보육비보조 등 거의 대부분의 복지 제도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시기에 도입됐거나 완성됐다. 그러나 빈곤 청년의 절대 다수는 이들 정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거의 없다. 그런 정도의 보장제도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만큼 일상을 유지하는 비용이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100만원의 기초생활보장이 아니라, 200만원짜리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빈자들은 생각한다. 일자리가 없어진 것은 민주정부시절의 일이다. 이들에겐 복지가 늘어난 기억은 없고, 일자리가 줄어든 기억만 남아 있다.
이 대목에 이르러 민주정부시기 복지제도의 확장은 자취없이 사라진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30대 초반의 청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전문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취직은 어려웠다. 어머니에겐 정신지체 장애가 있다. 어머니를 혼자 집에 둘 수가 없었다. 간병인을 구하려면 한 달에 80만원을 줘야 했다. 그런데 그가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월급 100만원 안팎의 일이었다. 집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돈 벌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인터넷으로 주식투자를 했다. 200만원을 날렸다.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어 신용불량자가 됐고, 이후 취직은 더 어려워졌다. 소식 끊긴지 오래된 형님이 어디선가 돈을 벌고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권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노인 장애인에 대한 혜택이 전혀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동사무소에서 받아온 알림장을 보여줬다. 간병인을 소개해주지만, 비용은 부담해야 한다. 자동차 기름 값을 지원해주지만, 자동차는 직접 사야 한다. “이런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는 아직 연애도 제대로 못해 봤다. 지금 그에게 민주정부시기 이룩한 복지제도는 허울이다. 복지는 법률에서 존재하지만, 전달과정에서 희미해졌고,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옛 동사무소, 오늘의 주민센터 담당 공무원은 어차피 할 일이 태산이어서 기초생활수급 신청 서류를 결재하기도 벅차다. 이들 모자가 사는 아파트엔 빈곤층을 위한 복지관이 따로 있다. 같은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인데도 1단지는 기독교계통, 2단지는 불교계통의 재단법인이 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다. 재단에 따라 복지사의 근무환경이 다르고 이들이 제공하는 복지서비스의 질도 다르다.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30대 초반 청년은 복지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이들 복지관 재정은 지자체에서 대고 있다. 복지는 전달의 마지막 단계에서 민간의 ‘자율’ 또는 ‘방치’에 의해 무력화된다.
터무니없는 제안이겠지만, 무조건 월 200만원은 지원해야 ‘구휼’의 효과가 생기고, 복지의 ‘수혜자’ 집단이 형성되며, 그들이 복지정치의 ‘적극 지지자’가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아울러 초중등 교육과정, 취업과정, 실직위기 등의 국면마다 누군가 등장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복지 상담을 해줘야, 그들이 복지정치의 실체를 알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경기부양의 신화가 (사장이라는) 인격을 통해 전파된다면, 사회보장의 신화 또한 (복지사 등) 인격을 통해 확산될 수 있다. 그런 수준이 된다면 보수 정권이 들어서고 복지제도가 후퇴했을 때, 가난한 자들이 강력한 저항을 시작할 것이다. 복지정치를 하겠다면, ‘엄청나게 더 많은 복지’를 ‘개별적이고 인격적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방식의 딜레마가 있다. 복지에 대한 기억의 역사가 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가난한 청년이 복지를 지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들의 지지가 있어야 복지의 정치를 시작할 수 있다. 뾰족한 해법이 없으니 딜레마다. 다만 이와 관련해 덧붙일 게 있다. 빈곤 청년들은 ‘탓’을 하지 않는다. 정부·정당·노조·언론에 기대를 걸지 않는 동시에 그들에게 제 인생을 책임지라고 요구할 생각이 없다. 부모사업이 망해버렸으니,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좋은 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만 말한다. 자신의 가난에 대해 정치인의 잘못을 묻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부모 세대, 즉 50대 이상이었다.
빈곤 청년들은 ‘경쟁’을 내면화하고 있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열성은 없지만, 경쟁에서 낙오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열패감을 자연스레 수용하는 것이다. 한국 공교육의 큰 틀이 바뀐 것은 김영삼 정부 때다. 그 전까지 아이들은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다. 인생의 목표가 나라와 민족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데 있다고 배웠다. 비록 열악한 노동현장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지만, 그래서 군사정권은 노동자를 ‘산업역군’이라 불렀다. 김영삼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완성된 현재의 교육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생의 목표는 세계화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개인의 경쟁력을 기르는 데 있다고 가르친다. 이제 어느 정권도 각별한 의미를 담아 가난한 노동자를 ‘호명’하지 않는다.
80년대까지 최고의 대학은 법대였고,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정치인 또는 법조인이었다(물론 현실에선 그렇지 않지만). 원론적으로 법과 정치는 공공의 가치를 다룬다. 군사독재가 주도하는 국가주의에 오염된 것이긴 했지만, 과거의 우리는 공동체에 대한 관념이 있었다. 90년대 이후 최고의 대학은 경영대가 차지했고,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펀드 매니저가 됐다(가난한 어른들의 꿈조차 로또 당첨이다). 근본적으로 주식·금융은 도박이다. 큰돈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번다. 현재의 우리는 공동체에 대한 관념을 교육과정에서부터 거세한다. 복지는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다. 복지를 기대하거나 따져 물을 논리적·정서적 근거를 빈곤청년들은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겠는가.
이들에게 더 나은 ‘물질적 풍요’를 약속할 수 없다면, 이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적 호명’이라도 필요하다. 사회적 호명은 공동체의 복원에서 시작한다. 공동체를 새롭게 정의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의 삶이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누군가 도닥여주어야 한다. 혜택을 주지 못하면, 의미라도 제공해야 한다. 그런 복잡한 생각 따위 집어치우고, 일련의 사태를 간단히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이들이 소수라고 치부하면 된다(물론 실제로는 명문대학을 졸업한 이만 빼고 대부분 빈곤의 궤적을 어느 순간, 어느 정도씩 밟고 있다). 현실이야 어떻건,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다수라고 치부하고 그들에 주목하면 된다.
그런데 그들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지금까지 설명한 빈곤 청년이 다시 등장한다. 현재 모든 4년제 대학생이 품는 최고의 꿈은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7·9급 공무원 시험학원이 밀집한 노량진 고시촌을 취재한 적이 있다. 일련의 시험과목 강의를 학원에서 모두 들으려면 적어도 1년이 걸린다. 대부분은 이 과정을 한해 더 반복하여 2년 동안 학원을 다닌다. 수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다. 공강시간에는 근처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잠은 고시원에서 잔다. 이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1~3년 동안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학원비·생활비 등을 더해 한 달에 적어도 50만원이 필요하고, 고시원에서 생활한다면 여기에 30만원을 더 보태야 한다.
이런 후원이 가능한 것은 오직 중산층이다. 중산층 자녀가 아니라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수 없다. 중산층 이상 부유층이라면 3~5년이 걸리는 사법·행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다. 100대 1이 넘는 그 경쟁에서 소수만 살아남는데도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이유가 있다. 중산층 4년제 대학 졸업자들은 대기업조차 안전한 일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대기업을 다닌 부모들이 온 몸으로 그렇게 증언해왔기 때문이다. 공무원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중산층의 안정적 생활기반이 자신의 부모세대에서 끝날 것임을 중산층 4년제 대학 졸업자들은 안다. 그들이 공무원이 되려는 것은 ‘공공’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공포다. 한국 중산층 청년의 미래를 보려면, 노량진에 가면 된다. 절대 다수가 비정규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될 벼랑을 볼 수 있다. 현재인 동시에 미래의 문제로서 빈곤은 소수가 아닌 다수 청년의 문제다.
정치는 소통이다. 무릇 정당이라면 이들 청년세대와 교감하고 싶을 것이다. 기자인 나는 그런 방법까진 모르겠다. 다만 그들을 취재할 때, 질문부터 하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밥 먹고 일하고 어울렸다. 세상이 남긴 상처 때문에 그들에겐 수많은 가시와 방패가 있는데, 그걸 스스로 거둬들일 때까지 섞이고 스미려 애썼다. 대화는 그 다음에야 가능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대화 자체만으로 즐거워했다. 비록 나의 기사는 그들의 삶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그들은 함께 일하며 밥 먹는 기자를 좋아해주었다. 지금 정치에 필요한 것은 통계로 분석하고 문자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두려워하는 이는 대통령이 아니라 주민센터 직원이고, 도움을 청하는 곳은 정당이 아니라 복지관이며, 진심으로 신뢰하는 이념은 언론이 아니라 사장에게서 비롯한다. 주민센터 직원, 복지사, 사장의 자리에 정치인이 가면 된다. 복지정치의 스타트 라인이다.
안수찬 <한겨레21> 사회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