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이가영(가명·48) 씨는 남편이 ‘몸짱 아줌마’ 얘기를 꺼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살찐 미련퉁이’라고 비아냥거릴 때는 행주를 확 던져버리고 싶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쏘아붙인다. “남은 음식 버릴 수 없어 다 긁어먹었어. 아이 둘 낳았더니 25kg이나 불었더라.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돈이라도 주면서 다이어트하라고 그래 봐라.” 말은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아닌 게 아니라 출렁거리는 뱃살이 부담스럽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누가 알아주나? 나중에 남편이나 아이들에게서 찬밥신세가 되는 건 아닐까?’》
7년차 주부 김영미(가명·38) 씨는 주변에서 ‘남편을 키웠다’는 말을 듣는다. 가난한 대학 강사를 만나 온갖 일을 다 하면서 생계를 책임졌다. 남편은 그 덕에 조교수, 부교수로 승승장구했다.
형편이 좀 나아지면서 김 씨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그러자 남편의 시선은 싸늘해졌다. 자신의 월급은 연구를 위해 써야 하는데 왜 직장을 관뒀느냐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건만 김 씨는 요즘 자신의 삶과 결혼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해 온 한국의 중년 여성들. 그러나 사회는 이들에게 ‘뻔뻔한 아줌마’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었다.
각 분야에서 여성의 진출이 눈부시다고 하지만 평범한 여성들에게는 이런 변화가 남의 일일 뿐이다. 무심한 남편, 까다로운 시댁, 엄마를 하녀 부리듯 하는 아이들에게 짓눌려 주부들은 가슴앓이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명절이 가까워지면 주부의 스트레스는 최고조에 이른다. ‘남자들의 명절, 여자들의 노동절’이란 말이 나온다. 명절이 지나면 병의원 정신과를 찾는 중년 여성은 평소의 2, 3배에 이른다. 연세대 신경정신과 민성길(閔聖吉) 교수는 “‘화병(火病)’이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라며 “특히 중년 여성의 화병은 일종의 분노장애”라고 말했다. 남편, 시댁, 아이들에게서 비롯되는 응어리를 켜켜이 쌓다 보니까 불면증이나 가슴답답증 등 신체적 증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중년 여성 사이에서 결혼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증가했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로 본 여성의 삶’에 따르면 40대 여성에게서 ‘결혼은 해야 하는 것’이란 의견이 1998년 72.7%에서 2002년 59.7%로 뚝 떨어졌다. 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란 의견은 24.7%에서 36.0%로 올랐다.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과 회의는 자신감 상실로 귀결된다. 본보 의뢰로 여성전문사이트 드림미즈에서 ‘어떨 때 전업주부란 사실이 싫은가’에 대한 설문을 실시한 결과 53.7%가 ‘스스로 도태되는 느낌이 들 때’라고 대답했다. 이어 ‘남편이 자신을 무시할 때’ 22.4%, ‘잘나가는 친구들을 볼 때’가 10.4%로 나타났다.
대화전문가 이정숙(李貞淑) 씨는 “주부는 하는 일이 없다는 인식이 중년 여성을 가장 힘들게 한다”며 “남편부터 아내를 귀하게 여기려는 인식의 변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한경혜(韓慶惠·가족아동학) 교수는 “남성은 나이가 들면서 소극적으로 변하는 데 비해 여성은 생물학적, 사회적 이유로 더욱 적극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며 “중년 여성들이 이러한 적극성을 긍정적으로 발휘하는 것이 가족은 물론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속터지는 여자들 2005 한국의 중년]<1>야속한 ‘반쪽’
《직업란에는 채울 게 없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제3의 성(性)’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남편에 따라 혹은 남편과 상관없이 ‘아줌마’ 혹은 ‘사모님’이라 불린다. 가족에게는 누구보다 헌신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이기적인 존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씩씩하다는 것은 불가사의다. 한국 중년 여성들의 삶과 생각을 담아 보았다.》
1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한 음식점. 한 여성 포털 사이트의 같은 커뮤니티에 속해 있는 50대 주부 4명이 오랜만에 만났다.
한미영(가명·55) 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남편이 대화라곤 할 수 없지만 자잘한 관심이 늘었어.” 신영숙(가명·54) 씨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받았다. “그게 바로 잔소리야!”
평소 남편에게 가지고 있던 불만이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왔다.
“가끔 남편이 냉장고 문을 열고 ‘안 먹는 게 왜 이리 많아? 쯧쯧! 다 버리겠네’ 하거나 세탁 바구니를 뒤적이면서 ‘빨래할 때가 됐는데 뭐 하는 거야?’라고 해. 그러면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
“우리 집은 딸만 셋이잖아. 딸이 제 아빠한테 ‘엄마 힘드니까 청소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면, ‘집에 여자가 넷인데 내가 청소해야 되겠냐?’ 이런다니까.”
“벽에 못이라도 하나 박으려 해 봐. 온 식구 다 불러. 누구야 의자 준비해라, 누구야 못 줘라, 누구야 망치 줘라…. 그러고 나선 못 하나 박고 뒤처리도 안 하고 가 버려. 차라리 내가 박고 말지!”
“지금껏 가족을 위해 희생했으니까 이젠 집에서 편안하게 쉬어도 된다고 생각하나 봐. 누군 놀기만 했나?”
이들의 대화는 결국 한숨으로 끝났다. 이미정(가명·58) 씨는 “이렇게 왜 사나 하는 생각도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도 없다”고 말했다. 신영주(가명·55) 씨도 “몇십 년 같이 살았지만 우린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통계청이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아내가 55.5%로 남편의 65.9%보다 10.4%포인트 낮게 나타났다.
고려대 신경정신과 이민수(李敏秀) 교수팀의 연구 결과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이 주부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29.7%)으로 지적됐다.
남편들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이나 하면서 무슨 투정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주부들은 그런 남편들 때문에 매일 속 끓이면서 살아간다.
새벽 귀가에 ‘곤드레만드레’는 일상사고, 얘기 좀 하자고 하면 바쁘다고 나가 버린다. 무거운 짐을 옮기고 있는데 TV 앞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서 꿈쩍도 안 한다. 그것은 참을 만하다. 하지만 친정아버지 생신날 식구들이 모이기로 했는데 전날 회식 때문에 피곤하다고 드러눕는 남편…. 애물단지가 따로 없다.
며칠 전 차로 주차장 벽을 박은 이채영(가명·49) 씨. ‘쿵’ 하고 부딪칠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러나 뒤따라 나온 남편은 자신을 힐끗 쳐다보더니 차 범퍼가 긁혔다고 타박하는 게 아닌가. 이 씨는 분하다 못해 눈물이 핑 돌았다. ‘저 남자, 정말 남편 맞아?’
남편 친구들과의 부부동반 모임에서 노래방을 찾은 박소영(가명·45) 씨는 남편과 싸울 뻔했다.
음치에 리듬감도 없어 노래를 잘 못 부르지만 분위기를 맞추려고 한 곡 불렀다. 그때 남편이 ‘친구 부인’들에게 “정말 노래 못하지, 노래 너무 못해”하면서 자신을 흉보더라는 것. 박 씨는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며 “남편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남편이 개인사업을 하는 주부 김현정(가명·48) 씨는 낮에 헬스클럽을 다니거나 쇼핑하면서 친구들에게 남편 험담을 자주하는 편이다.
성에 적극적인 김 씨는 남편에게 잠자리를 많이 요구하는데 그때마다 남편이 피곤하다며 거부하기 때문. 그래도 김 씨는 “밖에 나가 바람을 피울 인물도 못되고 무엇보다 착하기 때문에 그냥 참을 수밖에 없다”며 씁쓸해했다. 한정순(가명·56) 씨의 남편은 젊었을 때 호랑이 기세가 부럽지 않았다. 심지어 외박을 한 다음 날도 집에 당당하게 들어올 정도였다. 한 씨는 “그래, 어디 나이 들어서도 그러나 보자”며 참고 또 참았다.
몇 년 전 사업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앉은 다음부터 상황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또 다른 스트레스가 생겼다. 남편이 밥 때만 되면 한 씨를 찾는 것이다. 한 씨는 모처럼 친구들 모임이 있더라도 식사시간에 맞춰 꼭 집에 들어가야 했다.
“자기 멋대로 살다가 이제 와서 나에게 꼬박꼬박 밥을 차려 내놓으라니요.”
끼니마다 밥 차리는 것은 그렇다 치고 주부를 ‘열 받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아내의 수고를 전혀 몰라주는 것. 여성 포털 사이트 ‘드림미즈’에서 주부를 상대로 ‘남편이 언제 가장 미운가’를 조사한 결과 ‘자녀 양육이나 교육에 대해 협조하지 않을 때’(12.1%)나 ‘시댁 일엔 열심, 친정 일엔 늑장 부릴 때’(12.4%)보다 ‘마음을 몰라줄 때’(15.0%)가 더 많았다.
김현숙(43) 씨는 동갑내기 남편과 친정에만 가면 울화통이 터진다.
신혼 시절에는 “장인어른∼ 장모님∼” 하면서 아양도 잘 부리던 남편이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은 건넛방 TV 앞에 누워서 꼼짝도 안 한다. 친정어머니는 사위가 모처럼 와서 쉬는데 놔두라고 한다.
“낮 12시까지 실컷 자고 일어난 남편은 밥맛이 없다고 점심도 안 먹는대요. 미리 안 먹는다고 하면 차리지나 않지, 먹지도 않을 반찬 마련하느라 장까지 봐 온 우리 엄마만 불쌍해요.”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남편을 팽개칠 수는 없다. “대(大)자로 뻗어서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는 남편을 보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코끝이 찡해질 때가 있어요. 이 남자도 고생 많이 했지 싶어서…. 미워도 참고 살아야지, 어쩔 수 있겠어요.”
한국여성개발원 박수미(朴秀美) 연구원은 “가족 관계의 중심이 부모와 자녀로부터 부부로 이행하는 추세는 바람직한 일”이라며 “이제 부부도 남편은 경제적 부양자, 아내는 가정주부 등 고정된 역할에만 얽매이지 말고 서로 간에 애정과 친밀도를 높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속터지는 여자들 2005 한국의 중년]<2>시금치도 안 먹어
《20년차 주부 서경자(가명·48) 씨는 명절 때면 시댁 식구들의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그 칭찬이 징그럽게 싫다.
서 씨는 둘째며느리다. 약사인 큰며느리는 늘 바쁘다. 명절 때 시댁에도 늦게 오고 제사 음식을 함께 만드는 경우도 적다. 심지어 지난 설에는 아침만 먹고는 일이 있다면서 바로 가버리기도 했다. 그런 동서를 보고도 시댁 어른들이 아무 말도 않는 게 더욱 속상하다.
명절 준비는 오롯이 서 씨의 몫이다. 하루 종일 전 부치고 고기 굽고 있으면 ‘왜 나만 이 고생을 해야 하나?’라는 의구심이 든다. “둘째며느리 잘한다는 칭찬이 ‘게으름 피우지 말고 준비하라’는 말로 들린다”는 것이다.》
언젠가 “시댁도, 형님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남편에게 따진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이 던진 농담. “뭘 화를 내고 그래? 가정주부에서 ‘주’자 빼면 가정부 아냐?” 서씨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정말 가정부가 아닐까?’
외며느리인 김성희(가명·43) 씨는 추석 연휴가 짧은 올해 일찌감치 친정행을 포기했으면서도 지난해 추석 때 시어머니가 한 일을 생각하면 속이 끓어오른다. 그동안 시어머니는 연휴가 짧으면 당신 아들 힘들다는 핑계로 친정행 포기를 종용했다.
모처럼 명절 연휴가 길었던 지난해 연휴 마지막 날 설거지를 마치고 뒷정리하고 일어서려는데 시어머니는 갑자기 “친정에 가서 귀찮게 하지 말고 점심 먹고 가라”며 부엌에 들어가 국수를 삶기 시작했다. 김 씨는 “저녁 늦게 도착한 친정에서 머무른 시간은 1시간도 안 된다”며 씁쓸해했다.
중년의 주부에게도 명절은 부담이다. 신혼 시절에는 시댁에서 처음 맞는 명절에 음식 장만하랴 몸은 힘들고 친정 생각은 간절해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10년, 20년째 명절마다 시댁을 찾지만 시댁 식구들과 부대끼는 스트레스가 작아지기는커녕 날로 커져만 간다.
최근 명절을 앞두고 한 중형 병원이 주부 36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3.1%가 ‘명절증후군’을 겪은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명절증후군이란 추석 설날을 지낸 후에 어깨통증, 요통이나 심리적 스트레스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시댁과의 갈등, 과도한 음식 준비 등이 원인으로 꼽혔다.
김영주(가명·51) 씨도 명절 저녁이면 신경이 곤두선다. 저녁에는 시누이 가족이 ‘친정’을 찾는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친정에 보낼 생각은 조금도 없이 당신 딸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남의 집 며느리이기도 한 시누이는 와서도 수고했다는 말은 없고 나이 드신 친정어머니 걱정만 한다. 김 씨는 친정이 지방이라 명절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하지만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이제껏 위로 한 번 한 적 없다.
명절뿐 아니라 평소에도 시댁 식구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결혼생활이 즐겁지 않은 주부가 많다. 오죽 시댁 문제로 속이 끓으면 ‘시’자 들어간다고 시금치도 먹지 않는다고 할까.
손승영(孫承暎·여성학) 동덕여대 교수는 “가부장적 전통의 가치를 중시하는 가족일수록 주부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우게 된다”고 말한다.
맏며느리인 박현숙(가명·55) 씨는 명절보다는 한 해에 몇 차례 있는 제사가 부담거리다. 박 씨는 시아버지 제사를 벌써 29년째 맡아 하고 있다. 10여 명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박 씨는 “제사 준비만 하라면 까짓거 무슨 문제냐”고 말했다. 제사가 끝난 후에도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이어진다. 시어머니는 돌아가는 자식들 챙기느라 경황이 없다. 박 씨에게 “뭐해?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어야지”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조카들에게 용돈을 주지 않으면 “맏며느리 역할도 못 한다”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정은혜(가명·43) 씨는 시댁에 안부 전화할 때마다 가슴이 졸아든다. 정 씨의 남편은 시아버지와 함께 중소기업을 경영한다. 남편은 늘 일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온다. 대화도 거의 단절된 상태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정 씨에게 “남편이 편안해야 집안이 잘 된다”고 가르친다. 가끔 억울한 감정을 드러내려 하면 시어머니는 “우리 때는 다 그렇게 살았어.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라며 크게 혼을 낸다.
그런 정 씨가 친정을 챙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끔 남편에게 “친정어머니 용돈 좀 드리자”고 하면 “당신이 알아서 해”라고 퉁바리를 놓는다. “남편은 아직도 시부모의 아들일 뿐, 내 남편이 아닌 것 같아요.”
같은 여자이면서 시댁 식구로 ‘군림’하는 시누이들과의 갈등도 문제다. 최정미(가명·47) 씨는 뇌중풍으로 쓰러진 시어머니 병 수발을 들고 있다. 대소변도 받아내고 매일 죽도 떠먹여 드리기를 3년째. 몸도 마음도 지쳐 가는데 얼마 전 간병을 제대로 못한다고 손위 시누이들이 흉보는 걸 듣고는 기가 막혔다.
최 씨는 “우리 엄마 아프다고 울고불고 하는 시누이들이지만 자신들이 간병하겠다는 얘기는 죽어도 안 꺼낸다. 자기들은 누군가의 며느리 아닌가? 며느리 심정과 고생을 그렇게 몰라주는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한양대 구리병원 신경정신과 박용천(朴容千) 교수는 “평소 자잘했던 시댁과의 갈등은 명절이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를 계기로 악화된다”면서 “남편이 아내의 친정을 걱정해 주고 수고를 위로해 주는 게 갈등 완화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 유영주(劉永珠·가족학) 경희대 명예교수는 “중년에 접어든 많은 며느리들이 ‘이 고생은 내가 마지막’이라고 말한다”며 “‘낀 세대’인 이들은 시부모에게서 받은 ‘시집살이의 노고’를 자기 며느리에게는 그대로 물리지 않아 고질적으로 이어온 고부갈등의 고리를 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속터지는 여자들 2005 한국의 중년]<3>“이것 해줘…”
《고3 아들인 진수를 왕처럼 ‘모시고’ 사는 김숙자(가명·45) 씨. 남편은 “진수는 공부 잘하고 있나”라고 수시로 묻는다. “그렇다”고 답은 하지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동안 김 씨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아들을 교육해 왔다. 김 씨는 몸이 아파도 정보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엄마들 모임에 꼬박꼬박 나갔다. 이웃 엄마들이 추천하는 소위 ‘명문학원’에는 새벽부터 줄을 서서 등록도 했다. 그러다 보니 아들과 충돌이 잦았다. “엄마, 이렇게 한다고 대학 갈 수 있는 거야?”》
아들의 짜증이 늘자 남편은 “당신이 아이를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라며 아내만 나무랐다. 그리고 아이 문제는 십중팔구 부부싸움으로 불길이 번졌다. 남편에게 “평소에 신경이나 쓰느냐”고 대들지만 남편은 “당신이 (애한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지 않느냐”며 등을 돌린다.
김 씨는 요즘 밤중에도 몇 번씩 일어나 ‘이러다 아이가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가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한국에서 중년 여성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식들의 대학 진학 문제다. 자녀의 성적표가 바로 엄마의 성적표로 통하기 때문. 좋은 학원을 알아내고, 학원 스케줄을 짜고, 학원에서 학원으로 승용차로 이동시키며 몸이 허약할까봐 때때로 보약도 지어다 바쳐야 한다.
조영희(가명·48) 씨는 지난해 큰딸이 고3이 되면서 남편과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오롯이 뒷바라지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이가 학원 수업을 받는 동안 승용차의 흐릿한 불빛 아래서 취약과목의 요점정리도 해주었다.
그러나 자식 일이 늘 엄마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딸이 소위 명문대 진학에 실패한 것.
낙방 소식을 듣자마자 남편은 “당신, 도대체 뭐했어”라며 도끼눈을 떴다. 조 씨는 딸에게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내가 부족해서 딸이 대학에 떨어진 것 같은 생각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대한민국 40, 50대 엄마들은 ‘원더우먼’이 돼야 한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만능 엄마를 이르는 ‘슈퍼 맘’이 아니라 자식들의 높아진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울트라 슈퍼 맘’이 돼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집안일과 가족 뒷바라지는 기본이다. 거기에다 자녀가 공부를 못하면 엄마는 주변에서 ‘자격 미달’ 취급을 받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죄책감에 시달린다.
권원숙(48·서울 강남구 대치동) 씨는 중3 아들이 등굣길에 “운동화가 너무 더럽잖아요” 하고 불쑥 화를 내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느라 혼났다.
며칠 전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양말이며,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에 손톱까지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아들 책상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청소한 것이 화근이었다. 밤늦게 들어온 아들은 제 방 문을 열자마자 돌아서서 신경질을 부렸다.
“엄마, 내 물건에 손 좀 대지 마세요.”
박경숙(가명·49) 씨는 얼마 전 고2 아들과 함께 동대문 새벽시장에 옷을 사러 갔다.
아들과 시장 구석구석을 4시간가량 돌아다니면서 박 씨는 묵묵히 계산만 했다. 피곤하고 허리가 쑤셨지만 아들을 위해 참았다. 그런데 이 ‘아들놈’이 한다는 소리가 박 씨를 ‘뚜껑 열리게’ 했다.
“엄마가 백화점 옷 못 사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는 “매번 해 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듣는다”며 “‘나이 든 엄마가 따라다니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생각은 못할망정…”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들이 왕인 상황에서 엄마는 종일 수밖에 없다. 엄마는 쓸개도 배알도 없다. 심지어 아플 수도 없다.
진수정(가명·50) 씨는 지난 주말 몸살감기로 앓아누웠다. 일어나려고 해도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열이 들떠 도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다 큰 맏딸(27)이 “왜 점심 안 차려 주느냐”면서 입이 잔뜩 나와 있는 걸 보고 기가 막혔다.
“난 안 먹어도 좋으니까 네 밥은 네가 차려 먹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 얼굴에 침 뱉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자신이 잘못 키운 탓이려니 했다.
윤세창(尹世昌)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는 “주부들은 자식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고 있지만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나 위로가 뒤따르지 않을 때 스트레스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주부 우울증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특히 중년 여성들이 자녀 뒷바라지 과정에서 폐경기를 맞을 경우 빈둥지증후군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식이 대학에 진학한 경우나 결혼을 한 경우에도 기쁨과 함께 심한 허탈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뿌듯하지만 가슴 한쪽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일부 중년 여성은 더욱더 아이들 뒷바라지에 집착한다.
김정원(가명·52) 씨는 출근 준비를 하는 딸을 쫓아다니며 꼬마김밥을 입에 넣어 주곤 한다. 직장에 갓 들어가 힘들고 지쳐 보이는 딸이 걱정돼서 그러는 건데 그런 엄마 마음은 몰라주고 “입맛 없어. 안 먹는다는데 왜 이래” 하면서 짜증을 부릴 때가 많다.
“딸이 현관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출근하면, 그제야 깨달아요. 멍하게 젓가락을 들고, 내가 뭐하는 거지…. 그래도 다음 날 또 똑같은 일을 반복해요.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요.”
이화여대 함인희(咸仁姬·사회학) 교수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다 해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끝없는 자책감을 낳고 적절한 보상이 뒤따르지 않을 때 마음의 상처가 된다”며 “한국의 중년 여성들도 어떤 계기로 자녀와 심리적으로 떨어지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속터지는 여자들]<4>아내는 가구인가
《김선희(45·서울 강남구 신사동) 씨는 살쪘다고 남편이 구박할 때마다 자존심이 상한다. 일요일 오전 9시 아침 먹고 교회 다녀와서 점심 먹는 게 뭐가 잘못됐는지, 남편이 “또 먹느냐”고 할 때 서럽다. 남편은 같이 다닐 때도 앞서서 걸어간다. 김미화(가명·46) 씨는 얼마 전 남편 대학동창 부부 동반 모임에 다녀와서는 남편과 크게 다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그 친구 마누라 예뻐졌지”라고 몇 번이나 얘기하는 것이다. 집에 도착해 한 벌밖에 없는 여름정장을 옷걸이에 거는데 “당신 그 옷 입고 있으니 (그 마누라의) 언니나 이모 같더라”고 한마디 더했다.》
아내도 여자다. 외모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돈과 시간 문제로 가꾸기를 유보했을 뿐이다. 그러나 남편들은 아내를 언제나 집 안에 있는 가구쯤으로, 원하면 언제나 밥과 옷을 주는 ‘친절한’ 파출부쯤으로 여긴다.
최근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주부 4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76.4%가 ‘외모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답했다. 40%는 자신의 신체 부위에 대해 성형수술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 비만클리닉은 입원할 필요도 없어요. 아침에 뱃살과 허벅지살 1.5kg을 빼는 지방흡입술을 하고 와도 남편들이 모르니까 대부분의 주부들이 남편 몰래 하고 돌아갑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한 비만클리닉 전문의의 얘기에서 아내에 대한 남편의 무관심을 엿볼 수 있다.
박경희(가명·53) 씨는 그동안 자식 대학 보내고 남편 뒷바라지 열심히 했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꼈다. 남들이 뭐라 해도 머리 질끈 묶고 통치마 입으며 ‘여자’보다는 ‘아내’ ‘엄마’로 살았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TV를 보는데 남편이 “왜 마누라는 여자로 보이지 않을까?”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박 씨는 “아유, 나도 꾸미고 살아야겠네”라며 농담을 건넸다. 그런데 남편은 “당신은 저쪽 사람들과 계통이 다르잖아. 뭘 꾸며. 그대로 살지”라고 핀잔을 줬다.
박 씨는 어이가 없었다. “열심히 살기 위해 여자로서의 매력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배신감이 느껴지더군요.”
황인순(가명·52) 씨는 최근 큰맘 먹고 옷 한 벌을 샀다. TV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보다가 재활용품 모아 놓은 데서 옷을 고르는 주인공 맹순이가 자신의 처지와 너무 비슷해 괜히 심란해졌다. 황 씨는 “이제 그만 그악해지자”고 생각하며 백화점에서 30만 원짜리 옷을 샀지만 남편 눈치 때문에 옷장 안에 넣어두고만 있다.
대화전문가 이정숙(李貞淑·SMG 대표이사) 씨는 “남자는 사냥꾼이어서 이미 잡은 사냥감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남편 앞에서 함부로 옷을 갈아입거나 맨얼굴을 보여 주면 남편은 아내를 잡은 사냥감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처지는’ 자신의 몸매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것뿐이 아니다. 주부들의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마흔 지나 몸매가 변했더니 남편의 눈길도 달라졌다’는 고백이 종종 올라온다. ‘어디 가서 바람을 피우는 건지 요즘 잠자리가 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오죽하면 미국에서는 아내가 유방암 걸린 것을 남편이 제일 먼저 발견한다는데 한국 아내들은 목욕탕 ‘때밀이’들이 일러 준다는 얘기가 있을까.
강현미(가명·41) 씨는 얼마 전 싫다는 남편을 끌고 부부클리닉을 찾았다. 벌써 1년 가까이 남편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늙어 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애써 무시했다. 남편은 퇴근 후에도 강 씨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리고 서재로 들어가 컴퓨터에 푹 빠져 산다.
우연히 강 씨는 남편이 거의 매일 야한 사이트를 들락거리는 것을 알게 됐다. 어이도 없고 화가 나서 강 씨가 “당신 변태 아냐? 아내를 옆에 두고 그런 것들이나 보고…”라고 쏘아붙였다. 처음에 당황하던 남편은 그러나 곧 “당신이 여자야? 흥분이 돼야 하더라도 뭘 하지”라고 빈정댔다.
‘이제 나는 여자가 아닌가?’ 그런 고민 끝에 남편과 부부클리닉을 찾은 것이다.
서정애(가명·41) 씨는 얼마 전 남편 몰래 ‘큰일’을 저질러 버렸다. 남편이 해외 출장 간 틈을 타 600만 원이나 들여 유방확대수술을 받은 것. 뒤늦게 남편이 이 사실을 알고 대판 싸워야 했지만 그래도 서 씨는 상관하지 않는다. “마흔 넘어 처지는 몸매를 보는 게 안타까웠는데 볼륨이 있어 좋잖아?”
사실 서 씨는 성형수술에 관심이 없었다. 다 남편 때문이었다. 언젠가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였다. 평소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던 남편이 대뜸 “가슴이 그게 뭐냐? 노인네처럼…”이라고 타박하는 게 아닌가.
서 씨는 화가 나서 “그럼 수술할 테니 돈을 달라”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남편은 혀를 끌끌 차며 “돈 아깝게…. 그런다고 아가씨 되냐?”며 무시했다. 서 씨는 ‘그래. 두고 보자’라고 별렀고 남편 몰래 신용카드를 들고 가서 수술을 해 버린 것이다.
이화여대 함인희(咸仁姬·사회학) 교수는 “서구의 낭만적 사랑이란 개념이 들어오면서 부부간에도 날씬한 몸매와 성적 매력을 요구하고 있다”며 “결혼하면 사랑이 식는 것이 아니라 익는 것임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부부간 편안한 관계를 성숙한 사랑으로 승화하면서 친구처럼 함께 늙어가는 우리식 부부문화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