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05-08-17 04:23]
《1997년 말의 외환위기 이후 원래 직종에서 밀려난 사람의 68%는 소득이 적은 하위 직종으로 추락하거나 직장을 잃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당시 미취업자의 대부분이 희망하는 직종에 취업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본보 취재팀이 전국 5000가구, 1만3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국노동연구원이 실시한 노동패널조사 1∼6차연도(1998∼2003년) 자료를 재분석한 결과 드러났다.》
외환위기 이후의 직종변화 정도가 실증적으로 입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화이트칼라의 고용 상태 역시 매우 불안하다는 점이 이번에 확인됐다.
조사에 따르면 1998년 당시 사무직 근로자와 준(準)전문직은 각각 40.6%와 48%가 2003년에 서비스 근로자나 기능직 또는 단순노무직 등 하위 직군(職群)으로 추락하거나 직장을 잃었다. 화이트칼라가 외환위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음을 보여준다.
반면 외환위기 당시 기능원 등 생산직 근로자는 5년이 지난 후에도 절반 이상이 같은 일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위 직군으로의 추락은 쉽지만 상위 직군으로의 상승은 어렵다는 뜻이다.
1998년에 취업을 희망했던 무직자 1178명 중 2003년 현재 자신이 원하는 직종에 취업한 비율은 19.7%인 232명에 그쳤다. 이들의 절반가량은 여전히 무직 상태였다.
장기 실업에 허덕이는 구직자의 희망과 실제 노동시장의 수요에 큰 격차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사, 법조인, 대학 교수 등 전문직의 경우 설문에 모두 응한 217명 중 140명(64.4%)이 5년 뒤에도 같은 직종을 유지해 외환위기와 장기 불황의 파고를 수월하게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외환위기 이후 5년 간 취업자의 절반가량(51.8%)이 원래 직종을 유지한 가운데 ‘입법공무원, 고위 임직원 및 관리자’ 그룹과 ‘단순노무직 근로자’ 그룹의 직종 유지율이 각각 30.3%, 37.2%로 가장 낮게 조사됐다.
최상위와 최하위 직종에서 이동이 가장 심했다는 뜻이다.
노동패널조사는 전국 도시지역의 만 15세 이상 동일 그룹을 대상으로 신상과 가구원 현황, 직업 변동, 소비, 지출 등 경제활동 항목의 변동사항을 매년 추적 조사하는 것으로 1998년 시작됐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권혜진 기자 hjkwon@donga.com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여론조사]사무직 ‘추락 공포’…제자리만 지켜도 용한 일
[동아일보 2005-08-17 10:01]
《‘직군(職群) 상승’의 어려움, 화이트칼라의 고용불안, 비대해진 도소매 자영업, 희망 직종과 노동시장의 괴리…. 본보 취재팀이 한국노동연구원의 5년간(1998∼2003년) 노동패널조사 자료를 재분석한 결과 2000년대 이후 부각돼 온 사회경제적 문제가 구체적 수치로 입증됐다. 예를 들어 1998년 당시 고위 임직원과 관리자, 전문직 등 고소득 4개 직군에서 기능직 또는 단순 노무직 등 하위 직군으로 추락한 경우는 전체 1169명 중 425명(36.4%)이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하위 직군에서 고소득 직군으로 바뀐 사람은 2559명 중 159명(6.2%)에 불과했다. 초고속 출세나 신분 상승의 사례를 현실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추락은 쉽지만 상승은 어렵다=서울에서 대기업 부장으로 재직하던 박모(55) 씨는 1997년 말 외환위기로 40대 후반의 이른 나이에 명예퇴직을 당했다.
순식간에 실업자가 된 그는 다른 회사의 문을 두드려 봤으나 허사였다. 결국 퇴직금과 은행 대출금을 모아 작은 의류사업에 손을 댔다.
현실은 번번이 예상을 빗나갔고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그는 2002년 수억 원대의 빚을 진 채 회사 문을 닫았다. 부인이 반찬가게를 차렸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박 씨의 사례는 한번 직군이 추락하면 다시 회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 준다. 1998년 당시 사무직급 이상 고소득 직종에서 하위 직종으로 추락한 379명 중 2003년에 고소득 직종으로 다시 돌아간 사람은 67명(17.7%)에 불과했다.
서비스 종사자, 기능직 근로자, 단순 노무직은 직종을 바꾸더라도 비슷한 소득 수준에서 옮길 뿐 고소득 직종으로 올라서는 비율이 극히 낮았다.
▽외환위기가 직종 변동에 영향=기간별로 보면 1998∼2000년의 직종별 변화율이 2000∼2003년보다 7∼20% 높았다.
외환위기가 직종 변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서비스 근로자, 상점과 시장 판매 근로자, 농업 및 어업 숙련 근로자만 예외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직종의 하향 이동이 상향 이동보다 눈에 띄게 많았다. 예를 들어 고위 임직원이나 관리자 가운데 미취업자가 된 비율은 36.4%였다. 전문직이나 사무직에서 밀려난 상당수는 서비스업이나 판매업을 선택했다. 1998∼2003년 직종을 바꾼 사람 중 서비스업이나 판매업으로 전환한 비율은 1099명 중 209명(19%)에 달했다.
이 직종은 소득이 높지 않고 성공 가능성도 낮지만 실직자가 의지하기 쉬운 생존 수단이라 ‘도시의 농업’으로 불린다. 밀려난 화이트칼라가 다른 사무직 직종으로 수평 이동을 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 준다.
1998년 당시 구직자 가운데 2003년에 직장을 가진 비율은 50%에 불과했다. 5년이 지난 뒤에도 절반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설사 취업을 하더라도 대부분 비정규직 신분이었다.
같은 기간 여성 실직자가 원하는 직종에 취업한 비율은 17.1%로 남성(23.8%)에 비해 낮았다. 취업시장에서 여성에 대한 장벽이 아직도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대 이병훈(李秉勳·사회학) 교수는 “외환위기 당시의 실업자 절반은 2003년에도 미취업자였다”며 “장기간에 걸쳐 실업자 신분으로 남는 사람이 많으면 큰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고착되는 계급 구조화=이처럼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상하위 직종 간의 이동이 점점 어려워지는 현상을 전문가들은 ‘계급 구조화’라고 표현한다.
선진국에서는 1960, 70년대부터 시작됐다. 한국의 경우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계급 구조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외국과 다른 점은 상위 계층의 하락 폭이 높은 반면, 하위 계층에서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그 상태에 머무는 비율이 높다는 점이다.
전북대 설동훈(薛東勳·사회학) 교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학력을 매개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지만 요즘은 상당한 제한을 받는다”고 말했다.
우리 국민은 여전히 계급 상승에 대한 미련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고착화할 경우 사회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설 교수는 우려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직종 어떻게 분류하나▼
노동패널 분석에 쓰인 직종 분류 기준은 ‘한국 표준직업 분류’로 1992년 개정됐다. 세계노동기구(ILO)가 각국에서 사용하도록 권고한 ‘국제 표준직업 분류’에 국내 산업 운영과 직업 실태를 반영해 통계청에서 고시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국내 직업은 전문직, 사무직, 단순노무직 근로자, 군인 등 10가지로 분류된다.
‘직종 1’에는 고위 행정관료와 기업임원이 포함되며 ‘직종 3’은 주로 전문직 종사자의 지시나 감독에 따라 일하는 기술공을 말한다.
학계에서는 10가지 직종을 편의상 몇 개의 직업군(群)으로 묶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직종 1과 2를 ‘상층 근로자’, 직종 3과 4를 ‘중층 근로자’, 직종 5∼9를 ‘하층 근로자’로 나누거나 직종 1∼4를 상위직(화이트칼라), 직종 5∼9를 하위직(블루칼라)으로 나눈다.
이 중 가장 애매하고 논란이 되는 것은 ‘직종 5’로 ‘서비스 근로자 및 상점과 시장판매 근로자’다. 영세 도소매 또는 음식 숙박업 종사자가 많은 이 직종은 연구기관에 따라 상위직에 속하기도 하고 하위직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 분류 기준은 2000년 다시 개정됐지만 본보 취재팀은 이전 기준으로 직종 코드를 통일해 분석했다.
▼98년부터 5000가구 직업-가족 추적조사▼
한국노동연구원의 한국노동패널조사(KLIPS·Korean Labor and Income Panel Study)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진행되는 대규모의 추적조사다.
개인의 직종 업종 직위 소득 등 ‘직업력(曆)’뿐 아니라 가구원의 연령, 학력, 자녀 사교육비 명세 등 조사 대상자의 세세한 경제활동 지표를 해마다 묻기 때문에 직종 이동 연구에 유용하게 쓰인다.
패널조사는 1998년 전국 도시지역의 5000가구, 1만3321명을 표본으로 시작됐다. 이 중 77%가 지난해에도 조사에 응했다.
통계청에서 실시하는 경제활동인구조사도 추적조사의 형식을 띠고 있다. 하지만 표본이 5년마다 바뀌어 학계에서는 노동패널자료를 선호한다.
외국의 경우 미국 미시간대 부설연구소에서 진행하는 가구 패널조사(PSID)와 독일의 사회경제패널조사(GSOEP)가 유명하다. 각각 37년, 21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본보 취재팀은 정리가 완료된 6개 연도 자료 중 1차(1998년) 3차(2000년) 6차 연도(2003년) 설문에 모두 응한 8082명을 추려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미취업자는 성별, 학력, 연령, 거주지에 따라 나눠 분석했다. ‘직종 0’인 군인은 표본 수(6명)가 너무 적어 제외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