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오마이뉴스
▲ 땅끝에서 바라본 일출... 땅끝 전망대에서 바라본 일출
실로 오랫만입니다. 우리나라의 땅끝. 새벽을 달려 내려온 해남은 정말 멀고도 먼 남도입니다. 누구든지 한 번쯤 가졌을 끝을 가보고 싶다는 열망, 더 이상 갈 수 없는 그곳에 내가 서 있는다는 생각. 아마도 그러한 이유로 이 해남의 땅끝은 미련을 남기며, 여운을 안은 채 다시 올라가는 여행지가 아닐까요?
4월의 끝을 다가가는 시점. 봄이 찾아오는 속도만큼이나 아침이 다가오는 속도도 빨라집니다. 땅끝전망대 입구에 도착해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6시가 조금 넘어있었습니다. 피곤함도 잠시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겨 부지런히 땅끝전망대를 향해 올랐습니다. 바람은 그리 세지는 않았지만 남도의 아침은 아직까지 쌀쌀하기만 합니다.
해가 떠오릅니다. 이제는 섬아닌 섬이 되어버린 완도는 땅끝보다도 더 아래로 길게 뻗어있고, 땅끝마을 앞바다에 두둥실 떠 있는 흑일도와 백일도에서 아침햇살이 살포시 앉기 시작했습니다. 밤새 어두운 기운을 서서히 걷어내며, 사람들의 분주함을 일깨웁니다. 아침 해는 그렇게 떠올랐고, 붉은 기운이 가득한 잔잔한 바닷가에는 물 흐르 듯 고깃배들이 천천히 지납니다.
▲ 노화도로 가는 배 위에서... 갈두항에서 노화도 산양항으로 가는 배 위에서 바라본 땅끝마을...
오늘의 여정은 보길도입니다. 보길도와 노화도 사이에는 섬과 섬을 잇는 연도교가 근래 세워졌습니다. 갈두항에서 보길도로도 가지만 차를 가지고 가게 되면 노화도에 내려 보길대교를 건너 보길도를 들어가보기로 했습니다. 갈두항에서 출발한 배는 30분 남짓 걸려 노화도의 산양항에 접안을 합니다. 산양항에서 보길대교를 건너기전인 이목항까지는 10km정도로 그리 멀지 않습니다.
보길대교는 노화도와 보길도 사이에 있는 장사도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입니다. 보길대교를 건너 보길도에 들어서면 3갈래를 드나들며 여행을 해야합니다. 하나는 망끝전망대로의 드라이브를, 하나는 윤선도의 유적인 부용동정원의 문화유산 답사를, 마지막으로는 중리,통리해변을 거쳐 상록수림이 무성한 예송리 해변을 둘러보는 일정입니다.
세 갈래 여행일정 중 가장 먼저 망끝 전망대로 향해 해안도로에 올랐습니다. 망끝 전망대를 찾아가는 해안도로에서는 보길도 인근의 거대한 전복양식장이 눈길을 끕니다. 끝도없이 이어지는 양식장은 완도와 그 주변이 전복 생산의 70% 이상임을 몸소 느끼게 해줍니다. 정자리와 부황리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망끝 전망대에서 멈춥니다. 공사 중인지 진입이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망끝 전망대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올망졸망 떠 있는 갈도, 옥매도 ,상도, 미역섬과 어울려 건강한 푸르름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망끝전망대는 낙서로 얼룩져 있습니다. 망끝전망대의 철제 펜스 뿐 아니라 펜스 너머의 바위까지도 위험스럽게 낙서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곳을 다녀갔다는 흔적, 사랑한다는 흔적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요? 과연 낙서를 하게 되면 그 흔적이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그들의 사랑이 영원불멸하게 된다는 믿음을 주게되는 걸까요? 여행의 감흥에 겨워 한순간 끄적거린 낙서는 그들의 다음에 찾아오는 관관객들에게 눈살찌푸리게 만드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 않나봅니다.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섬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산 윤선도는 남인의 집안으로 당시 집권을 하고 있던 서인세력에 의해 여러 번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인조반정 이후 후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기도 했지만, 결국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다시 해남으로 내려옵니다.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임금이 강화도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윤선도는 가솔과 노비들을 배에 태우고 강화도로 향하던 중 인조의 삼전도의 치욕을 전해듣고 뱃길을 되돌렸습니다(삼전도의 치욕이후 윤선도는 고초를 당한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한 차례 유배를 가게 됩니다).
세상을 보지않겠다는 생각으로 제주도로 가던 윤선도는 상록수가 아름다운 섬을 하나보게 되고, 머물게 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보길도입니다. 윤선도가 만든 부용동 정원은 섬의 산세가 마치 피어나는 연꽃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낙서재와 동천석실 그리고 최고의 정원인 세연정을 만들게 됩니다. 윤선도는 은둔생활을 했으나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풍류를 즐기며 오우가나 어부사시사같은 작품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가문과 재력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으니 멋드러진 글이 안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부용동 정원은 살림집이 마련되었던 낙서재 주변과 휴식을 취하던 내 건너편 산 중턱의 동천석실 그리고 풍류를 즐기던 세연정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낙서재 주변과 동천석실은 보수공사와 복원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세연정은 적자산에서 흐르는 물을 판석보를 놓아 막았는데, 판석보는 물이 넘치면 폭포가 되고, 넘치지 않으면 다리가 되어 세연지의 물이 적정하도록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한편 세연지의 물을 끌여들여 인공연못이 회수담을 만들고 두 연못 사이에 정자를 지으니 이것이 세연정입니다. 사방 세칸의 팔작지붕으로 총 9개 칸중 맨 가운데 칸은 온돌로 되어 있고, 나머지 8칸은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들어열개창으로 개방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들어열개 창으로 사방을 개방한 세연정은 마치 비상을 하려는 듯 날렵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세연정 옆의 소나무는 그래서 더욱 운치가 있습니다. 세연정 뒷편의 동백나무 숲도 때마침 붉은 융단을 만들어내며 세연정의 운치를 한껏 더합니다.
해남 갈두항에서 출발한 배는 보길도의 청별항으로 들어옵니다. 보길도의 마지막 갈래는 청별항을 지나 통리, 중리, 예송리 해변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송시열의 글씐바위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통리와 중리 해변을 지나야 합니다. 통리와 중리해변 서로 1.5km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데, 모래로 이뤄져 있고, 수심이 얕은 해변의 모습은 거의 비슷합니다. 통리해변과 중리해변 사이에는 마치 해변을 정확히 나누려는 듯 목섬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목섬은 썰물 때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데, 게, 바지락 등 해산물 채취가 가능합니다.
송시열의 글씐바위는 보길도의 꼬리에 해당하는 백호리의 끝자락, 노안도를 바라보는 거대한 절벽 아래에 암각되어 있습니다. 잘 정비된 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면 송시열이 쓴 시의 원문과 해석을 새긴 비석이 있고, 송시열의 글씐바위는 비석에서 좀 더 바다쪽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송시열은 서인의 명실상부한 수장이었습니다. 보길도에 은둔한 윤선도는 남인으로 송시열과는 정적관계였습니다. 1차 예송논쟁때 송시열의 처벌을 상소했다고 오히려 귀향을 가게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암 송시열은 왜 정적이 머물렀던 보길도까지 내려왔을까요?
희빈이 아들을 낳자 조선 숙종은 세자책봉을 서두르는데,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상소를 통해 세자책봉이 성급한 결정이라고 비판하게 됩니다. 이에 분노한 숙종이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게 되는데 그후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이 단행되었습니다.
송시열이 제주도로 가는 도중 풍랑으로 잠시 들른 곳이 바로 보길도의 백자리 입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시를 암각하게 됩니다. 세자책봉이 이르다는 말을 충정으로 말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것은 노구의 몸을 귀양보내는 야속함이라고 할까요? 결국 83세의 송시열은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후 다시 뭍으로 나와 한양으로 올라오던 중 사약을 받고 죽게됩니다. 윤선도도 내쳐진 자신에 대한 처지에 한탄했고, 송시열도 유배를 가는 도중 이곳에 들렀으니 어쩌면 보길도는 정치거물들의 한스러움만 한없이 쌓인 것 같습니다.
중리, 통리해변을 지나 독사재와 샛바우재를 지나면 예송리 해변에 도착합니다. 샛바우재 정상에는 예송리 해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예송리 해변 앞바다에 떠 있는 기도와 갈마도, 예작도가 눈에 들어옵니다. 예송리 해변은 모래로 이루어진 중리,통리해변과는 달리 작은 자갈로 이뤄진 해변입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자갈들이 구르면서 또르르 또르르 소리를 내는데 맑고 청아한 그 소리를 듣고 앉아 있노라면 세상의 시름을 다 잊을 듯 합니다.
예송리 해변의 바닷가를 따라 방풍림으로 조성된 상록수가 펼쳐져 있습니다. 300여년 전 태풍을 막기위해 마을사람들이 조성한 숲으로 후박나무, 팽나무, 구실잣밤나무, 동백나무 등 수종도 화려하고, 700m 남짓 이어져 있습니다. 예송리의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 4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예송리 앞바다의 예작도는 마을사람들이 예의 범절이 밝아 예작도라 불렀다고 하고, 마을 앞으로 우거진 방풍림이 고기를 잡고 돌아오는 어부들에게 예의를 갖춘다고 하여 예작도라 부른다고도 합니다. 예작도에는 천연기념물 338호로 지정된 감탕나무가 있는데 할머니 당이라 부르고, 인근에 있는 소나무를 할아버지당으로 삼아 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예송리해변을 떠나기는 짐짓 쉽지 않습니다. 고요한 해변도 그렇고, 잔잔한 파도와 파도와 자갈이 만들어주는 소리에 취하다보면 앉아있다가도 낼름 팔베개를 하고 누워버리고 맙니다. 나중을 기약하자며 머물고픈 마음을 토닥거리며 일으켜 세우지만 결국 미련만 자갈밭사이로 묻어두고 맙니다. 나중에 올 때는 다른 일정을 잡지 말고, 예송리의 자갈구르는 소리를 원없이 들으러 한 번 와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1. 땅끝 전망대는 걸어서나 땅끝 전망대입구까지 차를 가지고 오른 뒤 5분정도 걸어오르는 방법도 있지만,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는 방법도 있습니다.
2. 어르신들은 모노레일을 이용해 오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겁니다.
(왕복 성인기준 4,000원, 문의 (061-533-4404)
3. 보길도는 차가 있다면 가급적 차를 가지고 가는게 좋습니다.(보길도에 머물러 있는 여행도 포함)
4. 차를 가져가는 경우 해남 갈두항에서 노화도까지 간뒤 산양항-이목항을 거쳐 보길대교를 건너면 됩니다.
5. 갈두항-산양향으로 운행하는 배편은 오전 6:40부터 매 한시간 간격으로 운행합니다.
(30,40,50분 출발하는 경우도 있으니 문의하세요 061-535-4268)
6. 부용동정원의 낙서재,동천석실은 보수공사중입니다.
(3월 28일 기준,보길면 관광안내소 061-553-5177)
7. 샛바우재 정상에서 예송리 해변 감상하는 것은 꼭 잊지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