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야기
나는 아침이 두려운 ‘9번 기계’였다
[표지이야기-노동 OTL]
종일 12시간 서서 일하면 떼어내고 싶어지는 몸과 머리…
감시 속에 말조차 잃은 단절의 작업장에서 보낸 한달
<한겨레21>은 그들의 세계로 직접 들어가보기로 했다. 시급 4천원짜리 일자리를 구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부닥치고 일했다. 그 돈으로 한 달 생활을 직접 꾸려보았다. 첫 번째 일터는 경기 안산 지역 공단의 중소기업 생산직이었다. 지난 7월 하순부터 구직 활동을 시작해 8월6일부터 9월5일까지 일했다.
시급 4천원의 노동자가 생존을 넘어 생활로, 생활을 넘어 행복으로 다가가는 게 가능할지 가늠해본 한 달간의 기록을 세차례에 걸쳐 전한다. 10월에는 일터를 옮겨 또 다른 ‘슬픈 노동’의 현장을 전하는 2부가 이어진다. 편집자
| |
여름 한철,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값싼 ‘을’이었다.
1970~80년대 공장 노동이 ‘여공’과 ‘미싱’으로 상징된다면, 지금은 전동 드라이버다. 계절 따라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공장 시계 돌아가는 소리는 아니 들리고, 일주일에 7일, 하루 12시간씩 나사 돌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곡절 끝에 취업한 A사, 대부분의 여공 손에도 드라이버가 쥐어져 있다.
날 알선해준 ‘갑’(ㄷ용역회사)의 ㅇ과장은 “한 달에 140만원 플러스 알파, 그래서 170만원까지 받아간다”고 설명하며 액수를 메모까지 해줬다. 지난 8월11일 아침 7시30분께 서명한 계약서 뒷면에 그가 볼펜으로 끼적인 ‘희망’이 선명하다. 하지만 그 희망이 얼마나 고되며, 또한 야망에 가까운지 깨닫기까진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아침 8시30분 종소리와 함께 라인에 서다
난 계약서를 쓰자마자 A사로 ‘배달’됐다. 함께 ‘을’이 되어 공장에 온 무리는 다른 인력회사에서 온 이들을 포함해 19명이었다. 이들은 통상 ‘용역’으로 불린다. 인력회사 관리들이 줄을 세웠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자 A사 생산부장이 와 사열해 있는 우리를 뭉텅뭉텅 갈랐다. A사는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석유난로·냉장고·비데 등 여러 가전제품을 컨베이어벨트 따라 쉴 새 없이 쏟아내는 탄탄한 중소기업이다. 나는 다른 6명과 함께 ‘라인 55R’에 배치됐다. 이 회사의 주력사업인 중소형 석유난로 제작 라인이다.
‘아, 마음의 준비가 덜됐는데….’ 아찔해하고 있을 찰나 종이 울렸다. 정확히 아침 8시30분, 탱크 바퀴처럼 육중한 라인이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겐) 기습적으로 시작된 첫 공장 근무는, 급류에 떠밀리듯 허우적대다 밤 9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오전 10시가 되자 허기로 멍해졌고, 11시가 되자 다리를, 오후로 들어서자 머리를 떼어내고 싶었다. 한자리에 꼼짝없이 서서 작업하는 상체를 받치는 다리가 꺾일 것 같았다. 사타구니 높이의 컨베이어벨트에 놓인 난로를 내려다봐야 하는 머리는 불필요하게 무거웠다. 오직 한마디만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단전돼라, 단전돼라, 신이시여 단전되게 하옵소서.’
텅 비우지 않으면, 머리를 기어코 컨베이어벨트 위로 내동댕이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즈음, 30대 후반의 반장은 “오늘 잔업은 9시”라고 알렸다. 오후 4시 남짓이었다. 이후 5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알 수 없다.
휴대전화를 꺼내 처음으로 시간을 봤던(작업 중 휴대전화를 꺼내는 이는 거의 정규직이라고 보면 된다) 8월19일의 기억이 선명하다. 오후 6시 야간 잔업이 시작되고 밤 9시가 멀었나 싶어 시계를 보면 7시10분이었고, 9시가 됐나 싶어 시계를 보면 8시였으며, 9시가 됐겠지 싶어 시계를 보니 8시40분이었다. 9시 라인이 멈추자마자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신은 없다.’
난로 제작 라인에서 내게 맡겨진 일은 간단하다. 아니 30~40명 작업자 모두의 일이 간단하다. 드라이버로 나사 두 개만 박는 이도 있었다. 내 작업표준서를 보면, ‘9번 공정’으로 ‘동편심 검사’라고 적혀 있다. 옆 공정에서 석유난로의 공기통에 심지를 끼워 전달하면, 나는 공기통 높이가 일정한지(동심), 공기통이 쏠리진 않았는지(편심), 심지의 높이는 일정한지(심지)를 육안, 링, 디지털 게이지 등을 이용해 검사한다.
보람도 사회적 자존감도 없는 노동
그래서 심지 높이가 7~9mm 범위를 벗어나면 펜치로 심지를 집어올리거나 쇠주걱으로 눌러내린다. 편심 허용 범위(3.95~4.75mm)를 벗어나면 쇠주걱으로 좁은 곳을 벌려준다. 그러면서 이제 갓 ‘엔진’을 단 난로 하나당 두세 번씩 손잡이를 돌려 심지가 올라오는 것을 살핀다. 그리고 공기통 캡을 ‘꼬챙이’라는 도구로 공기통에 고정한다. 대략 1분 안팎에 서둘러 해야 할 일들이다.
무엇보다 초반엔 서서 일하는 고통을 버티기 힘들었다. 노동 세계엔 서서 일하는 저주받은 자와 앉아 일하는 복된 자, 두 부류만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2주 정도 지나자 좀 익숙해진다. 이후에 경기 수원에서 일하는 40대 여성 노동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앉아서 일해도 집에 가면 다리가 퉁퉁 붓는다”고 하소연했다. 첫쨋주에 발바닥·목·어깨가 쑤셨고, 3주차로 접어들자 허리도 아팠다. 일곱 군데에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과 손마디는 지금도 통증을 느낀다.
물론 ‘라인’은 ‘인간’을 개의치 않는다. 붕어빵 찍어주듯 물량이 내게 건네진다. 오전 8시30분~10시30분 A타임에도, 10시40분~12시30분 B타임에도, 점심 먹고 오후 1시30분~3시30분 C타임에도, 3시40분~5시30분 D타임에도, 그리고 30분 저녁 식사 뒤 6시부터 저녁 8시나 9시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야간 잔업 때도 기계처럼 서서 목장갑이 닳도록 손잡이를 돌리고, 펜치를 쥐며 쇠주걱을 들이댄다.
안산에서 만난 수많은 노동자들에게서 일의 보람이나 사회적 자존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다시금 ‘공순이’ ‘공돌이’란 사회적 비하가 유행한대도, 이들은 침묵으로 ‘내면화’할 것이다. 별이 뜬 퇴근길은 그저 피곤하다.
일해도 가난한 노동자에게 희망은 오직 돈이다. 나부터도 날품으로 팔려가는 계약서에 서명할 때 ‘170만원’만 눈에 들어왔다. 올해 4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인 132만7천원을 훨씬 웃돌지 않나.
1. 시급 4천원, 상여금 230%, 임금 지급일 매월 11일
2. 근로시간 아침 8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휴게 시간 12시30분~1시30분)
3. 갑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에는 을과 합의하여 1주일에 12시간을 한도로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
4. 갑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에는 을의 의견을 들어 근무 장소 또는 업무를 변경할 수 있다.
5. 정규작업 시간 이외에 야간근로 및 휴일근로를 실시하는 것에 동의한다.
6. 최초 1개월 미만 근무시 작업복 대금 1만5천원을 공제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갑’이 내게 준 계약서 조건대로는 한 달 170만원을 웬만해선 벌 수 없다. 나와 한날 한 라인에 배정된 7명 가운데 5명이 2주가 채 안 돼 그만뒀다. ‘가난한 희망’마저 별처럼 멀어진다.
공단 담벼락 너머 연기 뿜는 여느 공장 안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첫날 풍경은 둘로 집약됐다. ‘공장 노동자’는 쉴 새 없이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반자동화 기계로 서 있다. 그들 머리 위 공장의 시계는 ‘국방부 시계’보다 천천히 간다. 그렇게 난로는 유유히 하루 1500개가량씩 완성돼간다.
이것이 어렵다, 어렵다 곡소리를 내는 중소기업들도 조금씩 살을 찌우는 비결일 것이다. 다시 짚어볼 문제지만, 모든 중소기업이 보호받을 만하거나 위약한 건 아니고, 모든 반장이 간악한 것도 아니다.
1. 단순 공정의 진실
단순 조립 노동. 안산에만 8만6천 명가량(2008년 안산시청 통계)이 일한다. 투자 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자리다. 모두에게 그렇진 않겠으나, 그래서 가장 값싼 ‘막장 노동’이 된다. 하지만 ‘단순하다’가 ‘손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은 기술이 아닌 요령으로 일한다. 요령의 부족분은 무조건 힘으로 때워야 한다. 극도의 단순 공정은 몇몇 신체 부위만 집중적으로 노쇠시킨다. 하룻새 양손에 물집이 잡혔다. 가만히 한곳에 서서 순간적으로 허리힘까지 써가며 편심을 맞추고, 악력을 키워 심지를 올리며, 손바닥과 어깨힘으로 심지를 누르느라 고통을 느끼는 일조차 분주했다.
“멍 때려야 시간이 간다”
특히 내 바로 옆 10번 공정은 ‘파견 노동자의 무덤’이었다. 난로의 내부 덮개를 씌우는 단순한 일이다. 홀더를 양옆에 끼워 볼트 4개만 조이면 된다. 이렇게 단순한 일인데, 2~3일 간격으로 사람이 바뀌었다. 대개 드라이버는 줄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데, 이 공정은 특성상 직접 손으로 쥐어야 한다. 무게가 있다. “팔이 마비되려고 해” “손이 펴지지 않는다”는 작은 절규가 사람마다 이어졌다. 파견 노동자는 쉽게 그만두거나 느리니까, 다른 라인의 정규직 노동자를 데려다 앉힌다. 그 또한 이튿날 파스를 붙이고 왔다.
‘단순하다’는 ‘지겹다’와 통한다. 손에 익지 않을 경우 고통은 천천히 오밀조밀 전해지고, 손에 익으면 고통보다 더 큰 피곤함으로 잠이 쏟아진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 같은 공포만큼 이들에게 버거운 것도 없다. 지방대를 다니다 8월 초부터 일해온 24살 정원식(가명)씨는 “A타임에는 김태희를, B타임에는 전지현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부터가 온통 음흉, 불량한 생각들에 사로잡혔다. 경기 부천에서 공고를 나온 염철수(28·가명)씨는 “멍 때려야 시간이 간다”며 “그땐 완전 (자신이) 기계예요, 기계”라며 한숨을 쉰다. 실제 라인 속도는 목표량에 맞춰 반장이 자유롭게 조정한다. ‘멍 때린’ 채 라인의 노예가 된다. ‘의식’이 비집고 설 틈이 없다.
공장에 근무한 4주 동안, 생산직 노동자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관해 얘기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딱 한 번 전날 뉴스가 회자됐는데, 탤런트 이영애씨 결혼 소식이었다. 한 남성 동료가 “더 이상 돈 벌 이유를 잃었다”며 경악했다. 동경하던 연예인의 결혼에 허탈한 심정이야 그렇다치고, 그들은 알까? 이영애씨가 드라마 <대장금>에서 받은 회당 출연료는 600만원 정도라는 사실. 5시간 동안 촬영한다면, 시급 120만원꼴이란 사실. 2003년 얘기다.
의지와는 상관없다. 오전 10시가 넘으면 허기가 져 텅 비고, 오후로 접어들면 지쳐 텅 빈다. 팔과 몸둥이만 라인 따라 움직이는 완전한 일체감을 맛본다. 내 공정을 자동화 설비로 바꾸려면 꽤 많은 돈이 들어갈 것 같다. 하지만 나는 1시간에 4천원을 받고, 평균 250~300개의 난로를 검사한다. 아주 저렴한 기계설비인 셈이다.
하루도 못 버티고 떠나는 사람들
그러니 떠난다. 텅 빈 노동, 빈곤한 노동에 기겁한다.
공고를 갓 졸업한 20살 하민우(가명)씨. 8월13일에 들어와 19일 그만뒀다. 그는 “공장이 제 일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34살 안산 출신 김정민(가명)씨. PC방과 부동산중개업을 하다 빚을 졌다. 수개월 실직 상태로 지내다, 결국 공장문을 두드렸다. 여성과 동거 중이다. 10번 공정을 맡았다. 8월12일 출근해 사흘 일한 뒤 더는 볼 수 없었다.
옌볜 출신 중국동포인 42살 남성. 가족과 함께 2006년 한국에 들어왔다. 올해 국적을 취득했다. 아내는 화장품 상자 공장에서 일한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 20만원의 방값을 낸다. 웃는 얼굴이 자애로운데, 여러 공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8월24일부터 닷새 동안 일한 뒤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사흘은 10번 공정을 맡았다. A타임이 끝나며 그는 “팔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는데, 점심시간을 앞두고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전화를 꺼내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았다.
20대 초반의 연인 관계로 보이는 남녀가 8월11일 나와 함께 한 라인에 배정됐다. 그 주 금요일까지 나흘을 채운 뒤 그만뒀다.
8월18일, 30대로 보이는 남성. A타임 2시간만 일하고서 말도 없이 가버렸다. 그도 10번 공정이었다. 반장이 작업 속도가 더디다고 채근을 좀 했다.
21살 남성. 동거 중인 여자친구(23)가 몇 달 아픈 바람에 전에 하던 공장일을 쉬었다. 9월3일 이곳으로 왔다. 그를 본 건 그날 하루뿐이다. 공기통에 심지를 끼우는 초반 공정을 도왔다.
내 위치에서 볼 수 있는 파견 노동자들의 ‘입출’이 대략 이러했다. 난로 라인은 작업표준서상 모두 28개 공정으로, 보통 35~40명 남짓이 울력한다. 후반 공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예고 없이 빠져나갔는지 알 수 없다. 대략 하루 6~7명이 라인에 새로 오면 그중 2~3명이 다음날 ‘증발’한다.
2. 착취의 속살
그런데도 공장은 계속 돌아간다. 기업은 수익을 낸다. 납득이 어려웠다. 인력회사 관리들의 말을 종합하면, A사의 생산 정규직은 140명 정도인데, 파견 노동자는 한창 많던 8월 중순 340~400명에 이른다. 기업공시를 보면 정규직은 사무직을 포함해 240여 명이다.
최저임금에 일도 고돼, 기척 없이 그만두는 이의 수를 예측하기 어렵다. 게다가 8월 마지막주로 접어들면서 파견 노동자 자체가 급감했다. 전체 260명 정도만 조달된다는 것이다. 8월27일 라인 반장은 “50여 명 정도가 인력회사에 등록하고선, 겨우 20명 정도만 온다”고 말했다. 대학생 ‘알바’가 대거 빠지고, 추석을 앞둔 시점에서 단가가 센 할인마트나 택배 쪽으로 사람들이 빠져나간 탓이다.
인력이 빠져도 목표량을 채우는 비결
그런데도 생산량은 또 큰 차이가 없다. 일일 1200~1500개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원리는 간단했다. 라인 가동 속도가 줄긴 하지만, 남은 자들이 다른 공정까지 바삐 수행하며 목표량에 근접시킨다. 라인이 느려도 맡은 공정이 많으면, 라인이 빠른 것과 다름이 없다. 당연히 업무 강도가 높아진다. 나 또한 8월 말 인력이 부족하자 검사 공정을 끝내고 드라이버로 나사까지 박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실소했다. 반장을 포함한 정규직도 피해를 본다. 라인을 돌며 관리·지시하던 반장도 꼼짝없이 공정 하나를 도맡는다. 그는 점심을 거르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반장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이 파견 노동자들의 잔업 통제다. 우리 라인 반장도 잔업 거부자가 많은 날엔 ‘육두문자’를 쓰며 방방 뛴다. 조례 때마다 “우리 라인 근태표가 가장 지저분하다”거나 “제발 잔업을 빠질 거면 3시30분 이전에 알려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상대적으로 미움을 덜 산다. 잔업 못한다고 하면 즉시 관두라고 하는 라인 반장도 있다. 잔업을 빠지려면 별의별 수모와 눈치를 감수해야 한다.
당연히 파견 노동자에게 소속감이란 찾아볼 수 없다. 관두라면 관둔다는 식이다. 2시간만 일하고, 또는 오전만 일하고 가버린다. 4천원짜리 노동은 차고 넘친다. 상징적으로 이 공장 화장실을 보면, 변두리 공원 화장실처럼 더럽다. 담배꽁초가 수북하고, 휴지가 가득 널려 있다. 누구도 깨끗이 써야 할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품질이 일정할진 알 수 없다. 다만 8월31일 밤 9시 잔업 뒤 종례를 기억한다. 반장은 “난로 3100개 가운데 3천 개가 불량으로 나왔어요. 스크루 박다 기스 나고, 라벨 비뚤어지게 붙이고…. 그거 나올 때까지 생산부장이 뭘 했냐고 그러는데, 나도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시말서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나, 사실 그는 인력이 빌 때마다 누구보다 바빴고 성실해졌다. 결국 9월 첫쨋주 야간 작업은 불량 제품의 재작업으로 대신했다. 경영진은 손해를 보았을까, 이득을 보았을까.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단가 후려치기 등 원-하청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합리를 탓한다. 그러면서 강요되는 손해분을 안으로 노동자에게 전가한다.
1분만 지각해도 30분치 시급 공제
대기업의 냉장고를 하청 생산하는 A사 역시 생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이기적 근태 관리들이 있다. 가령 업무 시작은 아침 8시30분이지만, 반장 조례를 8시15분에 한다. 조례가 끝나면 대체로 자기 위치에 가 부품을 정렬하거나 드라이버에 기름을 넣는다. 밤 9시 작업 종료 뒤엔 청소와 종례를 한다. 10분 안팎이 소요된다. 공원들은 실상 하루 20~30분의 공짜 노동을 하고, 사용자 처지에선 1명당 2천원씩을 버는 셈이다. 대신 노동자가 1분만 지각을 해도 30분어치의 시급을 제한다. 당근은 최소화하고 채찍은 최대화하는 메커니즘은 언제나 가진 자가 더 가질 수밖에 없는 동력이 된다.
준비운동으로 정확히 근무를 시작하는 공장이 엄연히 있다. 청소까지 근무 시간 내 공정으로 포함해둔 곳도 있다. 물론 더 인색한 기업도 많다. 시급으로 책정되는 2시간 간격의 쉬는 시간을 5분만 배정한 기업이 대표적이다. 그곳에서 일하다 온 한 파견 노동자는 “담배 하나 피울 시간이 안 됐다”며 증오했다.
일당으로 계산해 한국인에겐 5만원, 중국인 3만5천원, 동남아인에겐 3만원만 주는 공장도 있다. 이 공장은 때때로 새벽 3시까지 철야를 시킨 뒤 아침 8시에 출근하게 한다. 철야는 경영진에 이득이다. 값비싼 생산설비를 쉬지 않고 가동할 수 있고, 시급이 워낙 낮으니 수당 부담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자동차 산업이 어려워지자 파견 노동자 먼저 일괄적으로 정리했다. 이곳에서 쫓겨난 뒤 9월 초 A사에 파견 노동자로 들어온 22살 공원의 이야기다.
A사는 각기 다른 노선의 통근버스 3대로 노동자를 태워온다. 하지만 밤 9시 야근자가 많을 경우, 오후 5시30분이나 저녁 8시에 퇴근하려는 이들에겐 한 노선 1대만 운영한다. 상당수가 대중교통비를 써야 한다. 모든 라인이 잔업을 할 경우 오후 5시30분에 퇴근하는 이에겐 그조차도 없다. 결국 1천원이라도 아끼기 위해 공장 퇴근버스를 타려는 사람은 무조건 잔업을 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대중교통 노선은 우회하기에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 난 회사버스를 타도 밤 9시에 끝날 경우 집에 가면 10시가 넘었다.
잔업과 철야가 연일 가능한 것은 ‘빈곤한 노동자’가 항상 넘치기 때문이다. 이달 A사에서 일한 지 3개월째가 되는 40대 후반의 정성훈(가명)씨는 잔업이 저녁 8시에만 끝나도 화를 냈다. “저녁까지 먹었는데, 9시까진 해야지 돈이 좀 모이는데, 이게 뭐냐”며 ‘단전’을 외쳤던 내게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던진다. 많은 이들이 생활이 아닌 생존, 부유가 아닌 충족을 원한다. 그를 위해 ‘착취’조차 달게 받는다.
3. 침묵의 노동
근무 첫날 다섯 마디가량 말을 했다. 오전 10시30분 종이 치며 라인이 서자 “쉬는 시간이냐”라고 묻고, 낮 12시30분 종이 치자 옆 공정 중년의 정규직 여성에게 “점심시간이냐”라고 물었던 몇 마디다. 그 여성은 “응” 하면서 쏜살같이 식당으로 달려갔다. 안산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 가운데 하나다.
이후로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근무 중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특히 파견 노동자들은 입이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말을 하는 이는 대개 정규직이다. 휴대전화 통화나 문자 확인은 도덕과 상식, 인륜을 망각한 짓이 된다. 반장이나 경력 높은 정규직만 사용한다.
침묵의 노동은 일터의 행복, 연대감, 일을 통한 사회화를 일거에 잘라낸다. 몇 가지 이유가 보였다. 뜨내기 날품이 많은 탓이다. 처음 온 파견 노동자의 이름을 물어봤댔자, 그가 내일도 올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가장 값싼 파견 노동자들은 안면을 익혔거나 친해진 동료가 떠나는 걸 두려워한다. 더 좋은 일자리를 모른 채 자기만 정체돼 있다는 불안과 열패감이 있다. 실제 신입 파견 노동자가 많은 날은 공장 전체의 활력을 발견하게 된다. ‘동질감’ 덕분이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20대 여성은 며칠 만에 공장을 그만둘 즈음 이런 말을 했다. “왜 여기 사람들은 웃지도 않고, 말도 안 걸어줘요?” 그건 아마 시급으로 계산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생산 관리들의 통제다.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음악도 듣지 못하게 하는 마당이다. 침묵은 그렇게 관례화된 것이어서 파견 노동자는 첫날부터 자연스레 몸에 익힌다. 누구도 말을 잘 걸지 않기에 침묵이 강요된다고도 할 수 있다. 오후로 넘어가면 힘들어서 말을 하려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안산역은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으로 가는 주요 길목이어서 아침저녁으로 붐빈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말 걸자 반장 눈치 보며 외면
이미 제 커뮤니티를 잃거나 떠나, 홀로 인력회사를 통해 들어온 뒤, 혼자 일하다 혼자 밥을 먹는 이가 상당수다. 입 없는 이의 입으로 밥이 사라지는 풍경은 슬펐다. 내가 유일하게 받은 복은, 10번 공정에 다른 라인의 7~8년차 여성 정규직이 배치돼 말을 걸어주는 것이었다. 근무 3~4주차로 접어들며 조금이나마 적응이 된 배경이기도 하다.
“몇 살이야?”
“35살이오.”
“아이고 미안해, 반말해서.”
“아, 아니에요. 저랑 동갑도 아니시잖아요.”
“하하호호하…. 결혼했어?”
“아뇨.”
“에구, 엄마 속 타 죽겄네.”
“예.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걸 하고 있어요.) 그런데 반장은 돈 많이 받아요?”
“월급? 얼마 못 받아. 시급 좀 높고, 수당 6만~7만원인가 더 받을걸.”
“일주일에요?”
“뭔, 한 달에. 그러니까 반장 말 잘 들어.”
8월21일 처음 말을 걸어준 40대 정규직 여성(7년차)은 친절하고 활달했다. 하지만 이들조차 반장의 눈치를 본다. 작업 중 내가 얼굴을 보며 대화할라치면 “왜 날 보고 말해?” 하며 자세를 교정시킨다.
생산 정규직 대부분이 여성이므로 근무 중 대화도 대개 여성들의 것이다. 그 사이 넉살 좋은 20대 젊은 청년이 ‘대화 무리’에 쉽게 끼는 ‘우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성은 휴식 또는 점심시간에 담배를 피우며 주고받는 몇 마디가 그날 대화의 전부다. 시급에 대한 불만, 각 라인 반장에 대한 험담, 그리고 음담패설까지 담배 연기에 뒤섞여 더 자욱하고 질펀해진다.
비흡연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할까? 점심시간 공장을 돌아봤다. 불 꺼진 건물 안에서 혼자 멀뚱히 앉아 있거나 탈의실에 누워 쪽잠을 잔다. 휴식조차 침묵이다.
4. 정규직과 비정규직
초반 파견 노동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A사의 두 가지 단점을 들었다. “음식이 맛없다”와 “반장이 까다롭다”. 대신 (정규직) 아줌마 텃새는 적다고 했다. 공장 경력이 꽤 되는 여성 파견 노동자들이 가장 반겼다. 하지만 어디든 군기반장 구실을 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라인에서도 근처 공정에서 막히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파견 노동자에게 보란 듯 소리친다. “아이구 속 터져~, 아주 그냥 세월아 네월아 하네~” 식이다. 대부분의 40~50대 정규직 여성은 인자한 말년 병장과 매서운 일병의 얼굴을 동시에 지녔다. 오지랖도 넓으시다.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공정의 작업자한테까지 지적을 한다. 그러면 반장이 출동해 ‘해결’하는 식이다.
우리 라인 파견 노동자들이 금요일 잔업을 못한다고 해서 반장이 성을 내며 오후 5시28분에 라인을 세웠다. 지난 8월21일이다. 줄 선 작업자들 앞에서 “주간 목표량을 못 맞췄는데, 금요일 밤에 약속을 잡는 게 말이 되냐”며 한참을 질책한 뒤, 다른 라인에 지원 갈 남자 4명만 나오라고 했다. 급할 때 라인별로 인력을 서로 지원한다. 품앗이하는 것이다. 하필 반장 코앞에 내가 섰다. 어이없이 나가고 말았다.
온풍기 제작 라인이다. 큰 온풍기통을 옮기고 거기에 몇 가지 부품을 장착하는 첫 번째 공정이었다. 내 작업 속도가 빠른지, 더는 온풍기통을 옮겨놓을 공간이 없을 만큼 일감이 쌓였다. 난 잠깐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자 저 멀리 한 정규직 여성이 잽싸게 다가와 빗자루를 쥐어준다.
“청소해.”
“예? 이따 할 거잖아요.”
“그래도 해. 사람들이 싫어해.”
“공장 바닥 닳겠어요, 하하하.”
실소하며 난 청소를 했다. 또 다른 실소의 기억은 20대 후반의 젊은 남성 정규직이 줬다. 중년인 파견 노동자에게까지도 반말을 하는 등 자주 위압적이다. 뒤에 보니 ‘공공의 적’이었다. 난로에 장착할 부품을 한쪽에서 다른 파견 노동자들과 조립하고 있었다. 다리가 아파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상태였다. 지게차를 몰던 ‘공공의 적’은 경적을 울리며 내게 소리쳤다. “야, 너 일어나서 일해.” 속으로 ‘그럴게’ 하며 자세를 바꿨다. 나도 어렵지 않게 ‘공공’으로 포섭됐다.
사실 이곳의 정규직과 파견 노동자의 처우는 거의 같다. 시급 4천원짜리 노동자다. 다만 정규직은 상여금 600%를 받는다. 파견은 230%다. 처우가 비슷하니 정규직·비정규직의 차별이나 그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파견 노동자에겐 없다. 대신 ‘인간에 대한 예의’가 거의 모든 갈등의 핵심이 된다.
비정규직법이나 차별 문제는 사무직 또는 대기업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정규직을 희망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24살 정원식씨는 “내년까지 다녀 정규직이 될까도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내년엔 시급도 오르고 두 달에 한 번씩 90만원가량 상여금도 나오니 안정적이란 얘기다.
에필로그
육체적 고통, 침묵의 고통, 차별 따위가 라인 따라 쉴 새 없이 전해진다. 하지만 공장 라인 노동의 진정한 악질은 같은 노동자를 증오하게 하는 데 있다. 호흡이 맞지 않는 옆 노동자가 밉다. 내 공간이 좁아지며 불편해지고, 작업을 방해받는다. 나보다 쉬운 공정만 처리하며 같은 시급을 받는 또 다른 노동자들을 인사 한 번 주고받은 기억 없이 미워한다. 시간이 갈수록 더하다.
옆의 동료를 미워하게 만드는 시스템
소화 뭉치를 장착하기 위해 스크루 두 개만 박는 8번 공정과 공기통 상단부를 고정하려고 스크루 4개만 박는 7번 공정 동료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입 파견 노동자가 내 양 옆을 차지했을 땐, 내 작업에 지장이 없도록 부드러운 기계처럼 일해주길 바랐다. 아닌 표정으로 상대를 기계로 대한다. 그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내 인간성을 파괴한다.
8월 중순은 특히 더웠다. 선풍기 몇 대만 게으르게 돌고 있다. 라인이 빠르면 땀 닦을 시간도 없다. 처마 아래 빗방울처럼 심지로, 공기통으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첫쨋주가 지나자 목과 오른 팔뚝에 땀띠가 생겼다. 하지만 사실 추위가 더 무섭다고들 한다. 난로가 주력인 회사에 난로 하나 없어서 자기가 구입한 털바지에 털실내화를 갖춰입어도 춥다고 정규직들은 말한다.
9월1일 아침 8시10분, 이 회사 회장의 아들인 전무가 월례 조례를 주재했다. 그는 “올해 잘하면 최대 수익을 낼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며 “자부심을 갖고 경쟁력을 높여달라”고 주문했다. 강당에서 정규직과 파견 노동자가 뒤섞여 선 채로 20분 넘게 들어야 했던 연설의 고갱이였다.
하지만 그런들 파견 노동자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100억원을, 1조원을 돌파해도 시급은 주근 4천원, 야근 6천원이다. ‘용역’들도 모르지 않는다. 나는 다만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파견 노동자들을 앉혀주고 조례를 했다면 조금은 더 귀담아들었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한 사람이 허리가 아픈지 대놓고 “끄응~” 하며 몸을 숙인다.
인력회사에서 얘기하는 월급은 대부분 월~금요일, 주근과 2~3시간의 야간 잔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러면서 때때로 주말 특근까지 해야 받는 액수다. 당초 돈 쓸 시간이 없기에 절약이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그건 이들 빈곤한 노동의 유일한 장점이다.
8월20일, 조립품에 손가락을 베어 연고를 사려고 약국에 들렀다. 드디어 파스도 샀다. 이튿날부턴 목과 양어깨 부위에 파스를 2개씩 붙이고 다녔다. 거른 날이 드물다. 황량한 공장 마당에도 8월 말이 되자 결결이 바람이 불었다. ㄷ인력회사 과장이 야외 휴게소에서 “이게 무슨 냄새지? 향수 냄새가 나는데” 하며 미소지었다. 옆에 있던 염철수씨가 “이건 (사방 사람들이 붙인) 파스 냄새”라고 잘라 말했다. 또 한 번의 실소를 가을 초입 바람에 한참 흘려보냈다.
“9월5일. 햇살 따갑다. 손금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일곱 군데 굳은살이 박인 손이 몹시 거칠다. 손마디와 바닥이 많이 결린다. 이조차도 몇 주 뒤엔 사라질 것이다.”
운명이 아닌 실험이라 다행일까
4주간의 노동을 끝낸 다음날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다시 기자로 돌아갈 수 있어서라기보다, 지난 한 달이 운명이 아닌, 오직 ‘실험’이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던 것일까. 공장 노동자의 손금이 따로 있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를 사열시키는 컨베이어벨트는 영원히 쉬지 않고 돌며, 20살 여공부터 48살 가족을 책임지는 중년 남자까지 여전히 제 손금을 원망하며 나사만 하루 11시간씩 조이게 할 것이다. 그들이 선하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안산은 거대한 인간시장
[표지이야기-노동 OTL]
수백개 인력회사 '더 싸게 더 바쁘게' 내세워 경쟁..... 가난한 노동자와 초라한 일자리의 악순환
구직을 위해 경기 안산시를 처음 방문한 건 지난 8월6일, 뙤약볕이 포탄의 파편처럼 온몸에 박히는 날이었다. 그늘조차 증발시킨 듯, 연고 없는 도시의 첫인사는 거칠고 말랐다. 한 달을 살아보니 안산에는 5가지가 많다. 생활DC마트, 외국인, 관광버스, 노래방, 어린이집이다. 이 부조화로운 요소들은 하나같이 ‘가난한 노동’과 직결돼 있다. 그곳에서 나는 ‘35살 남성, 대졸, 군필, 공장 근무 경력 전무, 안산 거주(이사 예정)’라는 이력으로 ‘파견 노동자’가 되려고 종종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화로 문의하자 “직접 와서 상담하라”
사실 구직은 7월 후반에 전화로 시작했다. 그런데 첫 통화에서 막혔다.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데요.”
“요즘 모집 안 합니다. 일자리가 없어요.”
안산에 소재한 한 인력회사였다. 시작도 못하나 싶어 벼룩시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인력회사의 말과 달리 구인광고는 넘쳤다. 하지만 직접 고용은 드물었다. 거개 인력회사의 광고가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인력회사는 전화를 통한 긴 문답을 마다했다. 예제없이 나이와 야간 잔업이 가능한지만 묻고 “직접 와서 상담한 뒤 신상정보를 등록하라”고 말한다. 7월24일 ㅁ인력의 설명은 예외적이었다.
“광고 보고 전화드렸는데요. 자리 있습니까?”
“몇 살이세요?”
“35살입니다. 자동차부품 쪽을 찾는데요.”
“요즘엔 F-PCB(휴대전화 등의 칩 조립)가 더 많이 받아요. 일거리도 많고.”
“아 그래요, 얼마나….”
“5일 근무에, 토·일 특근, 주야 교대(일주일은 주근, 일주일은 야근)도 있고요. 그래서 생산 쪽에서 200만원이 좀 안 되게 벌기도 해요. 한국분들한텐 여기 먼저 소개하고 있거든요.”
“본사 면접도 본다면서요. 제가 공장 경험이 없어서. 이력서 필요한가요?”
“있으면 좋고요”
“뭐, 내세울 게 없어서요”
“없으면 뭐. 아무튼 면접 떨어지는 일은 거의 희박해요.”
“안산에 안 사는데, 기숙사 가능합니까?”
“요즘 기숙사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가까운 데 방을 구해야죠. 일단 와서 등록부터 하세요.”
8월6일, 나는 이 회사의 박아무개 과장 앞에서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정규직 되려면 얼마나 걸리나요?”
“보통 3~6개월 이상인데, (일을) 잘 못하고 좀 늦어지면 1년도 걸립니다.”
“제가 가게 되는 팀은 얼마나 일하고 받죠?”
“주야 교대조인데, 180만원 정도 돼요. 일요일 근무 같은 건 선택이지만, 되도록 해야죠.”
“보험은요?”
“고용·산재만 돼요. 나머진 지역에서 알아서….”
20~60대, 남녀, 다양한 인종 뒤섞인 안산역
나흘 뒤(8월10일)엔 이 회사가 인력을 대는 ㅇ사(반월공단)로 실려가 면접을 보고 있었다. 표면처리반의 팀장에게 내 이력서가 건네졌다. ‘파견’은 인사팀이나 임원들이 채용하지 않는다. 만나지도 못한다. 파견노동자를 직접 부릴 생산실무팀 팀장이 뽑는다. 30초나 됐을까. “혹시 약품처리 해봤어요?”라고 묻는 팀장의 우습다는 표정과 “약품을 만진다는 얘긴 못 들어봤는데요”라는 나의 우울한 표정이 교차하기까지.
결국 떨어졌다. ‘약품처리’라는 단어만 귓가에 맴돌았다. 이등병처럼 “시켜만 달라”고 해야 했을까? 기사 기획 단계에서 조언을 구했던 32살 여공 출신이 휴대전화 문자를 보내왔다. “표면처리반 1년 이상은 하지 말라고들 해요. 남자는 정자가 줄고 여자는 불임이 된다네요.^^” 팀장은 내 정자를 염려해준 것이라고 안위했다.
첫 면접에서 떨어지자, 당장 일자리를 잃고 분윳값이 떨어진 이들에게 견줄 바는 못 됐으나 혀가 말랐다. 결국 모두 5곳에 신상정보를 등록했다. 주민등록증을 모두 복사해갔다. 그 가운데 4곳엔 부모님 성함 등 가족관계와 경력을 적었다. 한 곳엔 미리 준비한 사진까지 붙였다. 내 정보가 안산 바닥을 어떻게 떠돌지 돌아설 때마다 오싹했다. 그 가운데 한 곳이 날 구제했다. 안산으로 온 지 나흘째, 8월10일 오후 6시였다.
하지만 뒤에 보니, 시급 4천원짜리 일자리를 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내가 다닌 A사에 인력을 대는 파견업체가 7~8곳이었다. 애당초 이곳에 들렀다면, 공연히 내 정보를 팔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이 세계조차 정보력 싸움인가 싶어 쓰렸다.
안산은 거대한 ‘인력매매 시장’이다. 아침 7~8시 반월·시화공단의 주요 길목인 안산역만 봐도 안다. 버스 환승장 일대에 20대에서 60대까지 남녀와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발 디딜 틈이 없다.
인력회사마다 주요 알선 업종은 물론 채용 방식도 다르다. 사용주가 면접을 보지만, 내가 일한 A사처럼 파견업체가 채용한 인력을 그대로 ‘납품’받는 경우도 있다. “35살은 안 뽑는다”고 했던 여러 파견·용역업체와 달리, 이곳으로 실려온 파견노동자들은 10대부터 40대 후반까지 다양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날품’이 거래되는 것이다. 물론 ‘하자’가 있으면 자른다.
하지만 이는 불법성이 크다.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보면, 파견은 200여개 직무로 한정된다. 건강·안전·건설 관련은 절대 파견 금지다. 제조직접공정도 불법이다. 고용 악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 불법 파견이 만연돼 있는 상황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가장 폭넓게 담은 현장이 되는 것이다.
안산 시내 파견·용업 업체 수만 300곳 이상으로 추산된다. 그만큼 경쟁적이다. 구제금융 이후 기업들의 아웃소싱이 급격히 확산되면서다. 파견업체 사장과의 인터뷰를 담은 책 <부서진 미래>에서는 “아웃소싱으로 경쟁시장에서 한몫을 차지하려는 파견회사는 사회 밑바닥 층인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퍼내, 보다 싼 임금으로 기업에 대주는 중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다른 파견업체가 인력 공급 계약을 새로 따내려면, 기존 업체보다 낮은 임금과 처우 조건을 내걸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 손해분은 노동자 몫이다. 실제 직접 문의해본 안산 시내 파견업체마다 중간수수료가 5~7%로 다양했다. A사를 알선해준 ㄷ사는 7%를 떼었다. A사에 비정규직일지언정 직접 고용됐을 때 107만원을 받는다면, 용역회사가 중간에 개입해 7만원을 떼가고 100만원만 받게 되는 것이다.
알선 수수료 5~7% 월급서 공제
파견·용역 회사는 상당수가 영세하고, 명멸을 거듭한다. 안산시흥비정규노동센터 박재철 소장은 “2년 전만 해도 확인한 파견업체 수가 230여 곳이었다”며 “오늘 망했다 내일 생기고, 아내와 자신 명의로 한 사업체를 두 곳인 양 영업하는 등 이 세계만큼 복잡한 곳도 없다”고 설명했다.
사실 A사보다 먼저 취직한 곳이 있었다. 방문 첫날(8월6일) “당장 내일부터 일하러 오라”고 했던 ㅁ인력을 통해서다. 하지만 조건이 상상을 초월했다. 아침 8시~저녁 8시30분 근무에 잔업이 밤 11시까지 된다는 정수기 조립회사였다. 점심 1시간을 빼도 14시간이다. 그런 노동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난 ‘필시 일주일 만에 혼절하리라’는 생각에 절망했다. 짐도 안산으로 옮기지 못한 상황에서 무리였다. 다른 자리를 구해달라고 했더니 이아무개 이사는 “정수기 회사에서 일하는 걸 좀 보고 자동차 조립회사에 넣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전화를 줄 리 만무했다. 직접 신상정보를 등록한 파견업체 5곳 가운데 2곳은 일을 시작한 뒤 자리가 생겼다는 연락을 줬지만, 나머진 지금도 소식이 없다.
초라한 일자리가 많은 건지, 가난한 노동자가 많은 건지 알 수 없다.
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글 싣는 순서
제1부 안산 난로공장
① 작업 라인의 노예
② 4천원의 삶과 행복
③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
||||||
악몽을 꾼다. 링을 컨베이어벨트 안으로 떨어뜨린다. 통근버스를 놓쳐 뛰고 또 뛴다. 1초까지 에누리 없이 채워 잔 뒤 새벽 6시20분에 일어나야 하는데, 뒤척이다 깨버리는 새벽 5시30분이나 6시5분은 원망스럽다. 8월 말, 여태 돌던 선풍기가 땀을 다 훔쳐내지 못한다.
현실이 악몽으로 다시 찾아오는 까닭은 아무래도 ‘영혼의 복수’다. 제 의식과 영혼을 보호 못한 육신에 던진 경고다. 그래서 난 육신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머리를 쥔 채 결근을 고민했고, 잔업까지 들어가면 ‘기자인 게 들통 나라’ ‘단전돼라’ 애절하게 주문했다.
하지만 그 따위 주문은 안중에도 없는 라인 앞에서 육신은 위약하기만 했다. 링을 놓친 건 8월17일, 야간 잔업에 들어선 뒤다. 손에 힘이 빠졌다. 쨍그랑~. 옆에 있던 8번 공정의 파견직 여성(31)이 다급히 물었다. “(컨베이어벨트) 안으로 들어갔어요? 밖으로 떨어졌어요?” 두 달 넘게 근속해온 것으로 보이는 ‘베테랑’이다. “모르겠어요, 못 봤어요” 하자 여성은 소리쳤다. “라인 세워주세요!”
쫓겨나거나 스스로 떠나거나
곧 라인이 멈추고 반장이 달려왔다. “이런 ×, 오늘 9시까지 도망가는 놈 하나도 없을 줄 알아.” 오늘 야근은 저녁 8시까지라고 이미 공지된 가운데, 군데군데 작업이 느려 화가 나 있던 차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국 컨베이어벨트 밑에서 반장이 직접 링을 꺼내줬다. 링이 잘못 끼이면 라인이 통째로 서는 모양이다. 링은 공기통에 올려놓고 심지의 높이를 확인하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도구지만 나 같은 날품 몇몇보단 귀할 것 같다, 아니 귀하다. 나는 비정규직이지만, 7~9㎜ 높이를 정확하게 재는 링은 정규직이다.
8월26일 2번 공정을 맡았던 한 여성이 쫓겨났다. 점심 식사 뒤 C타임(오후 1시30분~3시30분) 작업 중이었다. 작은 가방 하나 들고서, 지시 없이는 결코 떠날 수 없는 제 라인의 위치를 저벅저벅 벗어났다. 주변에선 “좀 이상한 여잔데, 유명해”라고 말해줬으나,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무엇이 이상한지, 무엇보다 그의 작업이 서툴렀는지에 대해 듣지 못했다.
8월19일 30대인 듯한 남성은 A타임(오전 8시30분~10시30분) 2시간만 일한 뒤 말없이 사라졌다. 전날 공장에 들어왔다. 1번 공정을 맡다 ‘용역의 무덤’이라 불리던 10번 공정으로 와 그는 허덕였다. 반장의 지적을 몇 차례 받았다. “왜 이렇게 느려?” “그것도 못해요?”
2시간 만에 내 옆 사람이 ‘증발’한 것에 진심으로 뜨악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닳고 닳은 ‘날품’처럼 말 한마디 먼저 붙이지 않은 내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그는 이틀 동안 철저히 침묵한 채 일하다 공장에서 사라졌다. 떠나니 말을 건다. “그냥 가면 어떡하느냐”는 험담들. ‘힘들죠?’라고 한마디만 건넸더라도, 하는 생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미안했다. 그들도 그날 악몽을 꾸었을까, 궁금했다.
2. 삶의 무게
고된 노동의 종착역이 ‘빈곤’이 되는 역설에서 벗어날 길 없는 이들에겐 악몽조차 달콤하다. 그것이 현실만 아니라면. ㅈ인력회사를 통해 A사로 들어온 정성훈(가명)씨의 고향은 경북 문경이다. 그의 나이는 46~50살. 이달로 55R 라인에서 일한 지 석 달째다. 우리 라인의 남성 가운데 ‘왕고참’이다. 나이도, 근속 기간도 가장 많다.
올 6월 중순 ㅈ인력의 구인광고를 보았다. 45살까지만 뽑고 있었다. 혹시나 하며 전화했지만 거부당했다. 일주일가량 지나자 같은 내용의 구인광고가 또 붙었다. 쉰 살까지 가능하단다. 당장 전화를 했다.
“첫날 (전동 드라이버로) 너트를 끼웠는데, 다음날 야 이거 니미, 아침에 손이 안 펴지더만. 이거 어쩔까, 한참 생각했지. 근데 뭐 수가 있나. 한 주만 더 해보자 했지. 그러다 다른 공정으로 바뀌고.”
한 학기 등록금 대려 137일 일하는 어머니
평생을 육체노동으로 살아왔으나, 몸값은 꾸준히 추락했다. 1988~98년 괜찮은 중소기업에서 호스를 만들었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공장은 문을 닫았다. 안산 고잔 신도시에서 건설 일용직 등을 했다. 드문드문, 하루 7만원을 벌었다. 그러다 천장공사 시공사에서 일했다. 올 초부터 돈을 받지 못했다. 결국 나왔다. “나이 때문에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야.”
반년가량의 실업 끝에 받은 첫 급여는 119만원. 그는 지난 6월에 생긴 이곳의 난로조립 라인이 다음달이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렇다면 그도 ‘없어질지’ 모른다.
경기 수원 지역 공장에 다니는 40대의 김영순(여·가명)씨는 15년간 식당에서 일을 했다. 주방과 홀서빙을 오고 갔다. “정말 힘들었다.” 임계치를 넘어서자 공장으로 왔다. 1년6개월이 넘는다.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올 1월부터 야근조를 지원했다. 평균 130만~150만원을 번다. 택시기사인 남편은 월 70만원을 벌어온다. 사실상 김씨가 생계를 책임진다. 저녁 8시30분부터 새벽 5시30분까지 일을 하고, 잔업으로 2시간을 더 한다. 하지만 잔업만 좀 줄어도 임금은 곤두박질친다. 지난 6월엔 83만3180원을 받았다. “어처구니없다.” 중학생 아들, 고등학생 딸이 있다. 저축은 없다.
A사에서 7년 동안 일한 정규직 김희숙(40대·여·가명)씨는 아들(24)이 자라면서 학비 부담이 생겨 공장일을 시작했다. 경기 고양의 자동차수리 공장에 다니던 남편이 화물운송업을 시작하면서 안산으로 이사왔다. 남편의 벌이가 줄긴 했으나, 300만원가량은 된다. 외아들은 자라 천안에서 대학교를 다닌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김씨는 공장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에 아들에게 부친 2학기 등록금 440만원은, 김씨가 하루 8시간 137.5일을 일해야 마련되는 돈(상여금 제외)이다.
‘안산·시흥 비정규직 노동자 실태조사’를 보면, 10명 가운데 절반가량(44.8%)은 “소득으로 필요 의식주만 해결할 뿐”이라고 했고, 20.3%가 “매월 적자를 보는 상황”이라고 답했다. 안산·시흥비정규노동센터가 2007년 7월부터 4개월 동안 330명을 대상으로 방문 조사(복수 응답)한 결과다.
3. 수렁에 빠진 청춘
28살 염철수(가명)씨는 경기 부천에서 공고를 나왔다. 기독교 물품 유통사업을 3년간 했다. 총판이 돈만 갖고 튀었다. 밑천은 어머니가 아들 결혼자금으로 모아뒀던 것이었다. 때때로 유흥업소에서 일을 하다, 지난 8월 A사에 들어왔다. 저축? 3천만원가량의 빚이 있다. 이를 갚으려면 하루 11시간 600일을 일해야 한다.
PC방과 부동산중개업을 하다 망한 김정민(34·가명)씨도 갚고 갚아 남은 빚이 7천만원 정도라고 한다. 1400일을 일해야 한다.
‘빚-비정규직-빈곤’의 악순환
한번 빠진 수렁은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운 사회다. ‘빚 - 비정규직 - 빈곤 노동’의 악성 트라이앵글에 걸린다. 빚진 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은 일해도 빈곤한 자가 되며, 그는 다시 빚에 노출될 공산이 크다.
‘막장 노동’에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도 크지 않지만 아주 없진 않다. 빈곤 노동자의 불안정한 삶은, 일거리가 줄면 돈을 못 받은 채 쉬는 불안정한 일터와 직결된다. 이것이 빈곤 노동자 사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다시 한번 가르며 격차를 낳는 요인이 된다.
안산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혁(22·가명)의 첫 직장은 평택의 자동차조립 공장이었다. 반장을 빼곤 모두 이주노동자였다. 일당 5만원(시급으로 치면 6250원)짜리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주근, 그리고 보통 밤 11시30분까지 잔업을 했다. 밤 12시까지 야식을 먹고, 새벽 3시까지 휴게 없이 철야를 하는 날도 있었다. 일이 많은 시기, 이주노동자들이 기숙하는 회사 컨테이너에서 잔 뒤 아침 8시 다시 라인에 서는 일이 일주일에 한 차례 정도 반복됐다. 그리 해서 버는 돈이 월 160만~170만원, 잔업이 적은 달은 130만원 정도였다.
화물운송업에 종사하는 아버지는 자주 다쳤다. 어머니는 안 계시다. 카드빚이 쌓였다. 전세를 월세로 바꿨다. 최근 반년가량을 또 다쳐 누운 아버지는 지난 5월부터 1t 트럭으로 바꿔 골판지 운송을 시작했다. 고교 운동선수인 남동생 학비, 빚, 집값, 차할부금·유지비 등을 내면 둘이 벌어도 남는 돈이 없다.
상혁은 대학교를 가고 싶다. “공부도 꽤 했다”는 그는 “물리학 같은 걸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첫 공장’을 소개해줬다.
A사로 옮긴 8월25일, 그는 직업소개소에 간다며 집을 나섰다. 그는 다시 급류에 휩쓸리듯 밤 9시까지 라인 앞에서 허우적댔다. 하필 휴대전화도 망가진 그날, 밤 10시께 귀가하자 아버지는 “어디 팔려간 줄 알았다”며 걱정했다.
물리학 배우고 싶은 노동자의 꿈
평택에서 1년6개월을 일했는데도 따져보니 번 돈은 700만~800만원. 믿기지 않는다는 내게 상혁은 “원청에서 파업하거나 일거리가 줄면 그냥 쉬거든요.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거나 저녁 8시(야근조)에 나갔다가 밤 12시에 퇴근한 것도 꽤 됐어요”라고 설명했다. 결국 지난해 11월 자동차산업이 어려워지자 회사는 상혁 같은 파견 노동자를 일괄 정리했다.
정성훈씨의 오늘이 20대 상혁과 철수씨의 내일일지 내다보기 어렵다. 다만 심지의 끝이 겨우 난로이듯, 이들이야말로 정해진 라인 안에서 절망과 빈곤으로 ‘완조립’돼가는 인생인지 모른다. 라인을 규정한 ‘경영진’은 누구일까? “잘살려면 성실하라”며 빈곤의 게으름과 무능력만 추궁하는 반장은 자본인가, 국가인가?
4. 일터의 불행
지난 9월11일 약간은 긴장하며 온라인 계좌를 연다. 인력회사가 급여를 송금하기로 한 날이다. 앞서 가불한 20만원을 더해, 66만7070만원이 찍혀 있었다. 8월치다. 9월 첫 주에 일한 건 10월11일에 받는다. 한참 웃었다. 예상치와는 너무 달라 토해낸 실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다른 사람보다 잔업을 덜 했으니’ 하며 ‘나태’를 스스로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실제 만난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선 ‘사회적 부당함’이나 ‘인간에 대한 결례’를 그저 삼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급여가 나와도 그 내역이 무엇인지 따지지 않는다.
내 경우, 8월31일까지 주근 112시간, 연장근로 25시간을 했다. 화·목요일 잔업을 무조건 걸렀고, 공장의 대응을 살피기 위해 한 차례 결근, 한 차례 조퇴를 일부러 시도한 결과다.
주근과 잔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아야 인력회사에서 ‘선전’한 급여에 다가갈 수 있다고 지난 1회 기사에서 밝혔다. 그렇지 않을 경우, 급여는 이처럼 극적으로 추락한다. 근무 초반에 만난 다른 라인의 30대 후반 남성은 “지난달(7월) 11시 야근을 12번 했다. 남자가 120만~130만원을 받아서 뭐하겠느냐”며 “매일 나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매일 잔업하는 게 중요하다”고 훈수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행복일까, 나는 의심스럽다. 일만 하는 것이 행복이 되기도 어려울 뿐더러, 하루 13시간씩 머무르는 이들의 일터에는 갖춰진 게 없다.
‘날품-정규직-반장’을 구별하는 옷 색깔
미안한 얘기지만, 규모가 상당한 A사는 교도소를 닮았다. 출퇴근 때마다 지문인식 기계에 날인 등록을 한다. 정문으로 들어오면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마당은 ㄷ자 구도로 3~4층짜리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다. 관리직 사무실이 들어선 중심 건물의 외벽 높이 커다란 시계가 걸려 있다. 딩동, 딩동, 딩동~. 근무 시작 5분 전, 근무 시작과 종료, 휴식 시작, 식사 시작 시각에 정확히 종을 친다. 모두가 그에 맞춰 일을 하고 멈춘다.
그곳엔 벗도 없고, 선후배도 없으며, 동아리도 없고, 오후 5시30분 퇴근버스도 (때때로) 없고, 파견 노동자에겐 휴가도 없다. 자녀를 위한 어린이집도 없다.
각 인력회사마다 색깔이 다른 티셔츠를 입힌다. 서로 이름을 잘 모르고, 옷 색깔과 인상착의로 구별한다. 날품들의 보라색, 검은색, 빨간색 등이 가득 핀 공장 마당엔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알 수 없는 이들의 땀내, 그리고 이방인들끼리 주고받는 낯선 눈빛만 가득하다. 그리고 정규직의 초록색, 반장의 주황색. 인력을 식별시켜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는 공장 풍경은 교도소에도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젊은 공장 노동자는 퇴근 뒤 PC방에서 1~2시간 게임을 하는 걸로 스트레스를 푼다. 24살 정원식(가명)씨는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만 하는 건 내가 아니고 죽어있는 나”라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곤죽이 된대도, 퇴근 뒤 새벽 1시 남짓까지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다. 그는 “유일하게 ‘자신’으로 돌아가 살아있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멸시’와 ‘부당’을 내면화할지언정, 모르진 않는다. 안산·시흥 비정규직 노동자 10명 가운데 64.9%가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이 너무 적다”, 39.8%가 “노동시간이 너무 길어 힘들다”, 39.1%가 “복리후생이 빈약해 불만이다”, 15.4%가 “관리·감독자가 인격적 대우를 하지 않는다”며 노동조건상 애로 사항을 토로했다.(‘위 실태조사’)
5. 공장 경제학
금융위기 이후 파견직이 활성화되며 축적된 ‘공장 경제학’은 한편으론 치졸했고, 한편으론 섬세하지만, 하나같이 공고했다. 당연히 유일의 가치는 최대의 생산효율이다.
40대 정규직 여성은 7년 전 A사에 입사할 때부터 정규직이었다. “정규직이 그만두면 차츰 파견직으로 대신하더니 3년 정도 지나고선 정규직을 아예 뽑지를 않았다”고 기억한다. 요즘도 간혹 공정 검사직은 정규직을 뽑는다는데, 난로 제작 라인에선 내가 맡은 ‘9번 공정’이 바로 그 검사직 가운데 하나다. 실제 처음 잔업을 빠져야겠다고 말했던 8월13일 반장은 “(너트 조립 등과 달리) 공정에 이름까지 올라가는 자린데 안 된다”며 “(잔업을 빠지면) 라인에서 뺄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 중요한 자린가 싶었다. 물론 다른 라인에 견줘 우호적 평가를 받는 반장은 날 보내줬고, 이튿날 라인에서 빠지지도 않았다.
귀마개도 목장갑도 나중에
A사에서 심지를 제작하는 이들은 매월 10만원을 더 받는다. 심지의 재료에서 나오는 먼지나 유해성 물질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라인에서도 심지를 공기통에 끼우는 1번 공정의 경우 만만치 않게 먼지를 마셔야 한다. 그는 토시를 끼고 앞치마를 두른다. 하지만 10만원은 없다. 마스크도 주지 않는다.
전동 드라이버 회전 소리에 첫날부터 머리가 부서질 것 같았다. 8월24일부터 휴지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즈음, 공장 벽엔 ‘귀마개 착용’이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단 사실을 알았다. 알려주지도 않고, 나눠주지도 않고, 도무지 라인만 내려보며 근무를 하니 2주가 지나서야 안내판을 ‘발견’한 것이다. 근무 1~2주엔 목장갑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8번 공정 여성이 “원래 월·수요일엔 새것을 줬는데, 이것도 소모품이라면서 요즘엔 잘 안 주네요”라고 말했다. 3주째가 되어서야 정상으로 지급됐다. 작업 전 “장갑 가져가”라는 반장의 지시는 노동자들이 가장 반기는 지시 가운데 하나였다.
A사는 지난해까지 밤 11시 잔업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량이 많이 나오면서 결국 밤 9시가 일반화됐다. 인력회사들의 설명이다. ‘용역’들은 거대한 공사 현장에서 구덩이 하나 파는 삽자루 같다. 새로 온 날품들에게 ‘전체 공정’을 일러줄 리 없다. 해당 공정 요령조차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는다. 반장은 기본 요령만 알려준 뒤 하루이틀 지나면서 때론 친절히, 때론 윽박지르며 노하우를 추가적으로 전수해준다. 이유가 보였다. 마찬가지다. 다 알려줘봤자 내일 안 나오면 반장만 헛수고한 것이 된다. 그래서 대체로 추궁당하며 배워나가는 게 많다.
노동자는 언제나 후순위다. 노동과 생산의 효율적 관계만이 이물의 방향을 결정한다.
사업장의 법정 복리후생 적용 여부를 묻는 질문에, 시간외 수당을 적용한다고 답한 이는 54.6%, 주 1회 유급휴일을 준다고 답한 이는 36.1%밖에 되지 않았다. 월차·연차 휴가를 준다고 응답한 이도 34~35%선에 머물렀다. 사내 복지시설 이용이 가능하다고 답한 이는 33.7%밖에 되지 않았다. (‘위 실태조사’)
6. 막장 노동 그리고 기만
이들의 임금이 적정하다는 논리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투자 없이 선택할 수 있는 ‘막장 노동’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안에서 정해진 법규나 관례로부터 ‘기만’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숨은 갈취들이 있다.
김영순씨가 다니는 수원 지역 공장은 잔업 수당의 일부(일주일당 4시간)를 본급의 1.25배만 쳐주는 '영특함'을 유지한다. 개정 당시 원성을 샀던 근로기준법 조항에 근거한다. 주 5일제가 적용되는 업체(현재 20인 이상) 경우, 초기 잔업 4시간의 수당은 1.25배로 칠 수 있다. 하지만 한달에 4시간만 가능하다는 해석이 있다. 그런데 주 4시간씩 잡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루 8시간 이외의 연장근로는 무조건 본급의 1.5배를 주는 곳이 많다. A사도 그렇다. 시급 4천원짜리 일자리에서 일주일에 연장근로 8시간을 했을 때 4만8천원을 받는 게 보통이라면, 이 회사는 4만4천원을 준다. 1.5배인 6천원을 4시간 적용하고, 나머지 4시간엔 1.25배인 5천원을 치는 것이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역대 최저로 60만원가량을 받았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의 반년 등록금을 내면 다 털린다. 가히 ‘김영순의 간을 빼먹는다’고 할 만하다.
대부분의 공장에선 일주일에 5일을 근속하면 이른바 ‘주차 수당’이라며 하루치 기본급(3만2천원)을 더해준다. 법적으로 명시된 ‘주휴수당’이다. 그런데 없는 곳도 있고, 이틀치를 주는 곳도 있다. 들락날락 하는 날품들을 잡아두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는 반대로, 불가피한 사정일지언정 하루만 결근해도 5만~10만원이 뭉텅 사라진다는 얘기다.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병이 나도 새벽 통근버스를 타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내가 받은 급여에선 4대보험 5만4930원이 공제됐다. 첫 주는 의지와 무관하게 화요일부터 일한 탓에 주차를 받지 못했고, 다음주는 하루 결근해 또 주차를 놓쳤다. 그리고 근무복 값 1만5천원이 또 떼였다. 원가는 7500원이라는데 믿기지 않는다. 인력회사는 이걸로도 이문을 남긴다.
정규직 최민우(32·가명)씨는 A사에서 일한 지 2년6개월이 된다. 1년 근속한 끝에 정규직이 되었다. 자신을 알선해줬던 인력회사는 “정규직까지 되지 않았느냐”며 퇴직금 주길 주저했다. 파견 노동자도 1년을 근속하면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노동청에 제소한다 만다 며칠을 따진 끝에 79만원을 받았다. 날품 경력 오래된 이에게 이런 일은 차고 넘친다.
안산·시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렇게 일을 해 10명 중 3.6명이 한 달 100만~150만원, 3.3명이 100만원 미만의 급여를 받았다. 조사 당시 시급은 3480원이었다.(‘위 실태조사’)
뭘 시켜도 잘할 사람들… 그런가
지난 8월19일, 아침 8시 공장 안을 둘러보았다. 이미 제 공정 위치에 서서 드라이버를 만지작거리는 이들이 있다. 짐차로 짐을 나르는 사람도 있다. 통근버스가 나를 공장 마당에 아침 7시45분에 부리고, 밤 9시10분에 실어갔으니, 정확히 13시간 25분을 공장에 있던 날이다.
사업이 망해 공장에 온 김정민씨는 활달했다. 10번 공정을 맡았는데, 주변 작업자에게 불안해 보일 만큼 자주 말을 걸었다. 물론 오후 들어서는 말수가 줄었고, 3일 뒤엔 아예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날 “정말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거 보고 놀랐다”며 “여기 사람들, 뭘 시켜도 잘할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런가. 알 수 없다. 세상은 ‘다른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9월4일, 근무 마지막날 퇴근길 기분은 묘했다. 프로젝트를 끝냈다는 안도감,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들 세계에 대한 미지로 가득하다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그날 공장 노동자들과 고깃집에 갔다. “목에 낀 심지 먼지 닦자”며 삼겹살을 시켰다. 딩동, 딩동, 딩동~. 직원 호출 벨소리에 모두가 기겁했다. A사의 종소리, 아 야근인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15만원 남았다, 희망은 남지 않았다 [2009.09.25 제779호] |
[노동 OTL-제1부 안산공장] 비정규직 공장 노동자로 살아본 한 달 가계부… 최소한의 ‘행복의 조건’ 지키니 1년 모아야 원룸 보증금 나와 |
가난은 ‘실험’하고 싶지 않다. “가난은 냄새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말에 동의할뿐더러, 한 달 번 돈이 적다 하여 가난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공장 일을 시작하면서 경기 안산으로 거주지까지 옮겼다. 무엇보다, 공장 노동자이자 독거 노총각으로서의 욕망과 실제의 수지타산이 어떻게 맞아떨어질 수 있는지 알고자 했다.
‘행복의 조건’을 정했다.
1. 화·목요일, 무조건 야간 잔업을 빠진다.
회사가 휴식을 허락하지 않아 여가를 즐길 수 없다면 행복은 애당초 봉쇄된다.
2. 일주일에 한 차례 과일과 고기를 사먹는다. 아침 식사를 하도록 최선을 다한다.
가장 부유한 5분의 1이 전체 육류와 어류의 45%를 소비한다는 지구에서 시급 4천원짜리도 좀 먹어야겠다.
3. 주방과 욕실이 딸린 집에서 산다.
말했다. 가난은 실험하고 싶지 않다. 일하는 동안 고시원에서 지내야 한다면 이 프로젝트는 접는다.
4. 한 달에 한 차례 연극이나 영화를 본다. 데이트는 가능할까.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여가 수단이다. 공장에 얼마나 많은 청춘남녀가 있는지 아는가.
5. 한 달에 한 차례 도서관과 수영장에 간다.
거의 매주 해오던 35살 노총각의 취미다. 얼마면 되겠니. 해야겠다.
물론 이는 누군가에겐 최소한의 ‘생존’ 조건이고, 또 어떤 이에겐 ‘생활’의 필수 조건밖에 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선 빈곤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자유와 쾌락을 향유하자는 주장(마쓰모토 하지메, <가난뱅이의 역습>)도 폭넓은 주목을 받는다. 소비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일하는 ‘자본주의의 노예직’을 거부하자는 것이다. 필요 없다. 오롯이 ‘수지타산’만 궁금해하기로 한다.
» 경기 안산 안산역 앞 고시원 밀집 지역이다. 이 도시엔 고시원이 많다. ‘가난한 노동’과 깊게 관련한다.
안산역 일대엔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거주한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고기는 일주일에 한 번, 영화는 한 달에 한 번
가장 먼저 타협해야 할 것은 주거였다. 다행히 1년 전부터 안산에서 거주하는 친구가 있어 방을 나눠 쓰기로 했다. 방 2개, 주방, 욕실, 베란다 등이 갖춰진 16평 정도의 다세대주택이다. 4500만원짜리 전세인데, 한 달에 20만원을 내기로 했다. 거기다 대부분의 식료품비를 대기로 했다. 친구는 전기·수도세·관리비 등 10만원가량을 냈다.
지난 8월7일 이사해 9월5일 퇴거했다. 그 사이 식료품비로 13만900원을 썼다. 라면, 햇반, 우유, 토마토 주스, 수박, 자두, 바나나, 생수 그리고 맥주와 간단한 안줏거리다. 일주일에 3만2천원 남짓을 쓰며, 과일은 한 차례 이상 먹었다. 다만 수박이 대부분이었고, 딱 한 번 자두 5천원어치를 사먹었다.
공장에서 오전에 허기로 ‘무아지경’에 빠지는 시점이 점점 빨라지자 3주차부터 바나나를 구입해 2개씩 먹고 다녔다. 그래도 번번이 첫 휴식 시간 이전에 얼이 달아났다.
말 그대로 아침 식사를 해먹는 일이 곤욕이었다. 난 아침 6시20분, 친구는 6시30분께 일어났다. 30분 아니 10분이라도 더 자려고 아침을 거르는 일은 전혀 무모하거나 어리석지 않다. 공장 근무가 시작된 8월11일, C타임(오후 1시~3시30분) 뒤 휴식 시간 10분, 소변이 마려웠으나 오직 앉아 쉬기 위해 참은 적도 있다.
한 달 동안 모두 네 차례 아침 식사를 챙겼다. 하루는 전날 먹다 남은 피자, 하루는 전날 먹다 남은 튀김닭으로, 하루는 전날 사놓은 700원짜리 빵으로. 9월1일 단 한 번 주방기구를 이용했다. 전날 친구와 아침 식사 당번을 정하자고 했다. 누구든 20~30분은 빨리 일어나야 한다. 라면을 끓이고 햇반에 반찬까지 올려 서로의 코앞에 갖다주기로 했다. 가위바위보에서 내가 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튿날 결국 5시50분에 일어나 먹었다. 친구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설사, 난 출근하자마자 설사를 했다. 점심 때도 했고, 퇴근 뒤에도 했다. 그러곤 다신 그런 ‘비생산적인 일’을 시도하지 않았다.
남성 노동자는 불편하면 거른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40~50대 여성 노동자들은 새벽 5시30분 정도에 일어나 가족의 식사를 준비했다. 밤 9시에 일을 마치고 들어가면 아침에 할 수 없던 설거지까지 할지 모른다. 남성 노동자들은 불쌍했고, 여성들은 위대했다.
그래서 유료든 무료든 아침 식사도 제공한다는 일부 회사들이 부러웠다. 아침 8시30분에 일이 시작하지만, 출근버스가 공장 마당에 내려주는 시간은 7시40분 정도다. 보통 빈둥대는데, 어떤 이들은 8시부터 라인에 서서 작업을 준비한다. 회사에서 아침만 주더라도 30분~1시간가량을 아낄 수 있다. 그것이 공짜라면 한 끼를 3천원으로 계산했을 때, 한 달 20일 근무일 동안 6만원을 아낀다.
회사에서 아침밥만 챙겨줬더라도
한 달 외식비로 19만8310원이 들어갔다. 구직 기간 4일 동안 오가며 사먹은 4천~5천원짜리 점심에, 금요일 또는 주말에 먹은 삼겹살값, 식사비도 포함돼 있다. 일하는 동안 시급 4천원이 넘는 식사는 사먹지 않겠다고 치기 어린 다짐을 했다. 대단히 어려웠다. 집 앞 뼈해장국이 4천원이라 일찍 퇴근할 때마다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그마저도 귀신같이 안산 거주 3주차에 4500원으로 올랐다.
사실 외식비엔 라인의 20대 공장 노동자들에게 금요일 근무가 끝날 때마다 사준 고깃값과 술값이 포함된다. 8천원짜리 삼겹살집에 들어갔다 7천원짜리로 옮기기도 했다. 치 떨리는 야근 1시간(6천원)을 해도 고기 1인분을 사먹을 수 없다니, 노동이 끔찍한 것인지 자본이 끔찍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어쨌건 이때 먹은 것은 n분의 1로 계산해 지출로 잡았다. 실제 가족이 없는 대부분의 노동자가 주말 한 끼 정도는 식당을 찾는다. 귀찮기도 하지만 밥을 해먹으려면 더 많은 돈을 들여 식료품과 주방기구를 갖춰야 한다.
8월23일 일요일, 서울 용산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보았다. 공장밥에 길들여진 뱃속에 카르보나라 스파케티와 포르시타 피자를 넣었다. 그리고 저녁에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영화 티켓 비용을 뺀 5만4940원이 내 카드 명세표에 기록됐다. 불과 10시간 만의 일이다. 하루 밤 9시까지 11시간 일을 해도 메울 수 없는 금액이지만, 공장에 부는 가을바람이 한강 강바람을 대신할 순 없다.
그날 본 <라르고 윈치>는 액션도, 스릴도, 심지어 여배우의 미모까지도 어중간한 영화였다. 세계 5위의 기업을 물려받은 양자로부터 회사를 뺏으려는 음모·혈투가 뼈대였는데, 도대체 5위의 기업을 만들기 위해 물 아래서 갈퀴질 하는 노동자는 보이지 않고, 오직 경영권에 눈 붉힌 이들만 가득했다. 거북했다.
약값 1만500원에 교통·통신비 5만원까지 치면, 내가 한 달 동안 쓴 생활비는 45만3150원이다. 여기에 방값 20만원을 더하면 65만3150원이다. 집에서 가져온 쌀, 반찬, 선풍기, 돗자리, 과일, 새 목욕용품 세트, 담뱃값 일부는 공제하지 않았다. 8월치 급여는 총 66만7070원. 9월1~4일 일한 대가는 10월11일 입금될 예정이다. 14만1천원이 예상된다. 수지타산은 정확히 15만4920원이 남는다. 살 만한가.
그들은 고시원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안산·시흥 비정규직 노동자 실태조사(2007)를 보면, 가구 지출 비중으로 양육·교육비(25.3%)와 주거비(21.9%)가 가장 컸다. 밑천 없는 이가 날품에만 의탁해 안전한 주거 공간을 확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고시원에서 원룸 → 주택 → 아파트로 옮겨가는 궤적은 그래서 필연적이고, 희망이다.
안산에서 자취가 가능한 주거 공간은 보증금 300만~500만원에 월세 20만~30만원짜리가 보통이었다. 친구가 없었다면, 15만원씩 1년 이상을 모아야 겨우 싼 원룸 보증금이 마련된다. 물론 정착 뒤 소비는 점점 더 줄 것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