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 6~11
출처 - 프레시안(www.pressian.com) 예종석/한양대 경영학 교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6)] 유일한
항일 특수공작원과 참 기업인을 넘나든 유일한
유일한 만큼 인생의 편차가 큰 인물도 없을 것이다. 한 세기 전에 불과 10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생에서 경영자로 성장하였고, 고국에 돌아와 민족기업을 일으키고는 항일투쟁을 위한 특수요원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기업을 키워 사회에 환원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그리고 참된 기업가이자 기부문화의 선구자로 우리의 근대와 현대를 이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이다. "이윤의 추구는 기업성장을 위한 필수 선행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그의 말에서 남다른 기업관을 엿볼 수 있다.
유일한은 민비시해 사건이 일어난 1895년 1월 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유기연과 김기복 사이에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기연은 장사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평양 시내에서 농산물 도매상과 유명한 싱거(Singer) 미싱 대리점을 경영하여 재력을 쌓은 상인이었다. 그는 일찍이 숭실학교를 설립했던 미국의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 사무엘 모펫(Samuel Moffett)에게 세례를 받았고, 단발을 앞장서서 실천한 개화인사이기도 하였다.
기독교도 유기연은 선교사들과의 교류 속에서 서양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고 있던 조국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아들을 선진 문명대국인 미국으로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리하여 미국에 아들을 보낼 방법을 모색하던 중 1905년 2월 외부 참서관을 지낸 박장현(朴章鉉)과 그의 조카 박용만(朴容萬)이 독립운동을 할 목적으로 미국으로 가려 하자 유일한을 그들에게 동행시킨다.
도미 후 1906년경 박장현, 정한경, 정양필 등과 함께 미주 중서부 지역인 네브라스카 주 커니 시에 이주한 유일한은 1909년 6월 박용만이 헤이스팅스에 설립한 미국 내 최초의 한국독립군 사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에 입교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게 된다.
유일한의 소년병학교 생활은 이 학교가 문을 닫은 1912년까지 계속되었다. 3년여의 기간이었지만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에 열렬한 무장투쟁론자인 박용만을 지도자로 모시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려고 하는 동지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받았던 소년병학교에서의 민족 군사교육은 어린 유일한에게 심신의 강건함과 담대함, 투철한 민족정신을 갖게 한 소중한 단련의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민족의식과 자주독립사상은 후일 그가 실천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천이 되고 참된 기업경영의 밑거름이 된다.
그 이후 그는 1915년 헤스팅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디트로이트 변전소에 취업하여 학비를 마련한 다음 1916년 미시간주립대학 상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가 졸업반이던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中央總會)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게 되자, 그는 서재필(徐載弼), 이승만(李承晩), 조병옥(趙炳玉), 임병직(林炳稷) 등과 함께 재미 한국인 대표로 선출되어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기초작성의원회(起草作成議員會) 대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작성, 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열강에 호소하였다.
유일한은 1919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미시간 중앙철도회사와 세계적인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등에 취직하였다가, 1922년 대학 동창생인 월레스 스미스(Wallace Smith)와 동업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를 설립하였다. 1925년에는 코넬대학교 의대 출신의 중국계 소아과 의사 호미리(胡美利)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그 후 회사를 잘 경영하여 30여만 달러 정도의 자금이 마련되자 유일한은 귀국을 서둘렀다.
유일한이 귀국한 직접적인 계기는 세브란스 의전의 학장으로 있던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의 초청이었다. 에비슨은 유일한이 연희전문학교 상과에서 강의를 하고, 부인 호미리가 세브란스병원의 소아과 과장을 맡아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자본주의의 힘을 체험했던 유일한의 선택은 달랐다.
미국에서 설립했던 라초이 식품회사의 원재료 수입을 위해 1925년 중국을 방문했던 유일한은 그 여행길에 조선을 일시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그가 가졌던 인상은 한마디로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었다'는 것이었다. 유일한은 이 문제를 단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 그 중에서도 제약회사를 키우는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유일한은 미국의 사업체와 재산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1926년 12월에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설립하게 된다.
그는 사업을 다각화하여 의약품 생산과 함께 위생용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하여 민중의 건강과 생활 향상에 힘쓰고, 우리나라의 특산품인 화문석, 도자기, 죽제품 등을 미국에 수출하여 민족자본 형성에도 기여하였다. 이는 당초 민족의 실력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던 부친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었고, 동시에 선생이 품고 있던 민족적 대업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특히 1928년에는 <동아일보> 지상에 최초의 염료 광고와 약품 광고를 게재하여 큰 수익을 올리는 사업수단을 발휘하는 한편, 보스톤에서 <한국에서의 소년 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란 책자를 출간하여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활동도 하였다.
그 후 세계 각국과 교역을 하며 회사를 성장시킨 그는 귀국한 지 12년 되던 해인 1938년 4월 재차 도미하여 사업 활성화에 전력을 다하였다. 한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 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같은 해 8월 미주 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됐다.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임시정부 후원과 외교 및 독립운동자금 조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12월에는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 주 민병대 소속으로 맹호군(猛虎軍)으로 알려진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의 편성을 적극 후원하였다. 1941년에는 남가주대학(USC) 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하였다.
1942년에는 당시 미육군 전략정보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소설 <대지>의 작가 펄 벅(Pearl Buck)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유일한은 그해 8월 로스앤젤레스 시청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태극기 현기식(懸旗式)에 참여하여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등의 축사를 낭독하였다. 이는 비록 미국에서나마 한인 동포들이 일본 국민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민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감격의 순간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결실이 있기까지는 유일한의 보이지 않는 활동이 밑받침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조국 광복에 대한 그의 투철한 의지는 1945년 미군의 한국 침투작전인 냅코 작전계획(Napko Project) 참여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미육군 전략정보처(OSS)에 의해 수립된 이 계획은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 한인들을 선발하여 특수공작 훈련을 시킨 다음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이었다. 이같은 작전계획은 미주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참여한 독수리 작전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1945년 1월 유일한은 이 작전계획의 핵심요원으로 선발되어 침투, 폭파, 통신, 낙하산 등 특수공작 교육을 받고, 제1조 조장으로 임명되어 '코드명 A'라는 암호명을 부여받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작전은 일제의 항복으로 말미암아 안타깝게도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가 이미 지천명의 나이라는 50세에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유일한은 후에 미 국무성의 비밀문서 등을 통해 그 실체가 밝혀지기까지 평생 동안 한마디도 이 작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광복 후 미국에서 귀국한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여 사장과 회장,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인간 존중을 사업의 기본철학으로 가지고 있던 그는 육영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시대부터 종업원들의 소양 교육을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1952년 전란 중에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비뿐만 아니라 숙식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며 숙련된 지식 노동자의 양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65년에는 오늘날의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개인 소유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여 학교를 계속 지원하였다.
유일한은 기업경영에 있어서도 선구자적인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현한 경영자다. 그는 유한양행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자신이 100% 소유하고 있던 주식의 52%를 액면가액 50원의 10%에 사원들에게 양도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한 것이다. 1962년에는 민간 기업으로서는 경성방직에 이어 두 번째로 유한양행을 상장시켰다. 액면가 100원으로 상장했는데 주가는 상장하자마자 6배로 뛰었다고 한다.
유일한은 나눔의 경영을 누구보다도 일찍이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1971년 세상을 떠나면서 유한양행 주식 14만941주를 기부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남김없이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기부했다. 이를 종자돈으로 해서 설립된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은 2005년 말 현재 유한양행의 1대주주와 3대주주로 200만 주에 가까운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가치는 3000억 원에 육박하고 있다. 유한재단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1969년 유일한은 기업경영의 일선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는 이때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조권순(趙權順) 전무에게 사장직을 승계하여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다. 그에게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던 유능한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것이다. 물론 소유도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선재단과 종업원, 그리고 국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라는 그의 기업관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유일한은 정경유착을 하지 않았고 납세의 의무를 철저히 지킨 경영자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할 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기업풍토에서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시절의 많은 사업가들이 권력에 밀착해 이권을 따내고 부를 축적했지만 그는 역대 정권의 탄압과 유혹 속에서도 일절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
그는 세금에 대해서도 철저했다. 세금을 탈루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할 때에도 유일한은 그러지 않았다. '기업이 세금을 많이 납부해야 정부가 국민을 위해 예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상식을 가진 그는 조금의 누락도 없이 세금을 납부했다.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혹독한 세무조사를 수없이 받아야 했지만 한치의 어김도 없이 납세의 의무를 지켰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1968년에는 3개월에 걸친 세무조사 끝에 어떤 혐의도 발견되지 않자, 오히려 모범 납세자로 선정되어 정부로부터 국내 최초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일한은 기업인으로서만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그 어려운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서 각고의 노력 끝에 기업가로서 몸을 일으켰으며, 사업가로서는 꿈도 꾸기 힘든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고, 나아가 나눔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에게 기업은 목적이 아니라 나눔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은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서라고 강조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76세로 운명하였다. 정부는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고 1995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7)] 미국의 기부문화
미국은 새로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를 만들었다. 그들의 노블레스는 기부자들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새로운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화를 만들기 위해 그 영웅들의 역사를 참고해야 한다.
기부의 역사를 만든 사람: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카네기는 위대한 기부자이다. 그는 엄청난 부를 사회에 환원했다는 점에서도 훌륭하지만 미국의 역사에 찬란한 기부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위대하다. 지금 현재 미국에 존재하고 있는 5만6000여 개 자선재단의 시발점에 그는 우뚝 서 있다.
그는 "인간의 일생은 두 시기로 나누어야 한다. 전반부는 부를 획득하는 시기이고, 후반부는 부를 나누는 시기여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일생을 그러한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게 산 사람이었다. 그는 또 일찍이 자신이 집필한 <부의 복음(Gospel of Wealth)>에서 "부자인 채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부의 사회환원이 부자들의 신성한 의무임을 강조한 선각자였다.
카네기는 1835년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수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급진적인 좌파 성향의 정치색을 띤 인물이었다. 그러나 카네기는 아버지의 정치적인 이념보다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184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의 슬럼가에 정착한다. 카네기는 13살 때부터 섬유기계공, 증기기관 관리자, 전보배달원, 전신기사 등의 여러 직업에 종사하다가 1853년 펜실바니아 철도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그곳에서 당시 철도 고위관리인이었던 토마스 스콧의 눈에 들어 그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전쟁 후 스콧은 자신의 철도관리인 직을 카네기에게 물려준다. 안정되고 높은 소득이 보장된 철도관리인으로 일하면서 카네기는 수입을 침대차회사에 투자하여 큰 이익을 얻었으며 철도기재 제조회사, 운송회사, 석유회사 등에도 투자하여 상당한 수익을 얻는다.
이때 주식투자로 번 돈은 훗날 창업자금이 된다. 1865년 철강 수요의 증대를 예견한 그는 철도회사를 사직하고 독자적으로 철강업을 경영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수시로 영국을 방문하여 철강산업의 엄청난 성장을 목격한다.
그는 현대 산업이 기존의 철 기반에서 강철 기반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간파해, 영국 기술자인 베서머로부터 최신식 용광로를 구매하고 본격적인 강철 제조사업에 뛰어든다. 그리하여 1872년에는 미국 최초로 거대한 평로(平爐)를 가진 홈스테드 제강소를 건설하게 된다.
전쟁 뒤 미국은 철의 수요가 급증했다. 영국 역시 철도산업이 붐을 맞으면서 철강의 수요가 전례 없이 치솟았다. 때를 만난 강철 산업의 호황으로 카네기의 사업은 승승장구, 어느새 수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벌어들인다. 1870년대부터 미국 산업계에 일기 시작한 기업합병 붐을 타고 그는 피츠버그의 제강소를 중심으로 석탄, 철광석, 광석 운반용 철도, 선박 등을 수직계열화하는 하나의 대 철강 트러스트를 형성하게 된다.
1889년에는 오랜 동업자인 헨리 프릭에게 회사의 사장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뉴욕에서 연구개발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1892년에는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생산라인을 규합해 카네기 철강회사(Carnegie Steel Company)를 설립하는데, 이 회사는 당시 세계 최대의 철강 트러스트로서 미국 철강 생산의 4분의 1 이상을 생산하는 규모였다.
이즈음 회사의 이익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된 프릭은 1892년 대규모 파업이 발생했을 때 300여 명의 파업 저지대를 조직하고 시위자들을 무차별 폭행하며 파업을 무력화시켰다. 이때 10명이 사망하고 60여 명이 부상하는 참극이 벌어졌으며, 주지사의 명령으로 군대까지 동원돼 진압에 나섰다. 이런 불상사까지 빚으며 카네기 철강은 노조를 끝내 해산시킨다.
가혹한 노조 탄압 뒤에 카네기 철강은 기적적인 급성장을 기록한다. 1900년 강철 생산량은 10배가 넘게 증가했으며, 매출은 20배 이상 오른다. 당시 카네기 철강이 생산하는 강철의 양은 영국 전체에서 생산되는 강철의 양보다도 많았다.
1901년 카네기는 자신의 철강회사를 JP 모건(JP Morgan)에 5억 달러에 매각한다. 당시 일본 예산이 1억3000만 달러였다고 하니, 이것이 얼마나 큰 돈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JP 모건은 카네기 철강을 인수함으로써 미국 철강시장의 65%를 지배하는 US스틸을 탄생시킨다.
이 합병을 계기로 카네기는 실업계에서 은퇴하여 본격적인 자선사업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의 신념대로 '부를 나누는 시기'인 후반부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카네기는 이 합병으로 얻은 돈으로 인류 발전을 위한 기금을 운영한다. 그는 미국과 영국에 총 3000개의 도서관을 지었으며, 미국의 과학 발전을 위해 카네기 과학연구원과 기술원을 잇달아 설립한다. 이 연구소는 후일 미국의 명문대학이 되는 카네기 멜론 대학의 모태가 된다.
그는 또 각종 문화예술 분야에 거액을 돈을 쾌척했으며,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세계 평화를 위한 기금(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도 설립한다. 카네기 홀, 카네기 인스티튜트, 피츠버그의 카네기 도서관, 카네기 박물관, 스코틀랜드대학의 카네기 장학기금, 워싱턴의 카네기 인스티튜트, 덤퍼린 카네기 장학기금, 뉴욕의 카네기 코퍼레이션 등이 모두 그가 만든 단체들이다.
카네기 재단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교육, 국제평화와 안전, 국제발전, 미국 민주주의의 발전 등 4가지 분야인데, 그 중 교육분야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카네기는 기업을 매각한 후 18년 간의 여생 동안 자신의 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데 썼다. 그는 오랫동안 어떻게 하면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부를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인지를 고심했다. 카네기에 의하면 잉여자산을 처분할 수 있는 방법은 3가지가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공익기관에 유증하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살아 있는 동안 소유자가 직접 관리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
카네기는 자손에게 부를 물려주는 첫 번째 방법은 그것을 물려받은 자손에게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많은 유산은 의타심과 나약함을 유발하고 비창조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만약 당신이 자식의 진정한 행복을 생각한다면 결코 많은 재산을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식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겨주는 것은 독이나 저주를 남겨주는 것과 같다"고 경고했다.
두 번째 방법인 공익을 위해 부를 유증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유증된 재산이 쓰이는 것을 볼 때, 그 재산이 당신 사후에 당신이 바라던 대로 사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기 힘들다. 유증자가 바라던 진정한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유증자의 소망이 무시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유증된 재산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기념하는 기념물로 이용된다."
카네기는 세 번째의 경우가 가장 적합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경영수완과 무한한 창의력을 가진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나누어 주는 방법과 기술도 창안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들이 가난이 무엇인지 안다면, 경험에 의해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을 것이므로 가난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부자는 자신에게 신탁된 재산을 관리하라는 소명을 받은 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역사회에 최상의 혜택을 줄 수 있는 방식으로 잉여재산을 관리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따라서 부자는 단순한 수탁자에 불과하며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대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네기는 가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선이라는 것이 어떠한 효과를 갖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맹목적으로 광범위하게 베풀어지는 단순한 자선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오늘날 이른바 자선이라는 이름으로 쓰이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 정도는 바람직하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 자선행위는 그것을 통해 치유 내지는 경감시키려 했던 악을 오히려 유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부를 축적하는 데도 뛰어났지만 부를 나누는 것에도 혜안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한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결코 부끄럽지 않은 부자였다. "통장에 많은 돈을 남기고 죽은 사람처럼 치욕적인 인생은 없다. 재물은 남을 위해 사용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카네기가 남긴 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8)] 석유왕 록펠러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는 양극을 오가는 인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석유회사 스탠더드오일을 설립해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지만 사생활에서는 독실한 청교도인으로 성실과 경건함을 삶의 최고 가치로 여겼다. 그는 편법으로 석유사업의 동맥인 철도를 장악하고 리베이트와 뇌물로 경쟁자들을 쓰러뜨리면서 1870년 후반에는 미국 정유 능력의 95%를 독점해 경제발전에 수많은 폐해를 끼쳤다.
결국 록펠러로 인해 독점금지법이 만들어졌고, 스탠더드오일은 여러 개의 석유회사로 분할된다. 회사가 해체된 후에 주가가 더욱 올라 사상 최고의 부자가 된 그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으며, 은퇴 후 죽을 때까지 검소하고 독실한 농부로 살았다.
1839년 뉴욕 주 리치포드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록펠러는 기독교 근본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14세 때 클리블랜드로 이사 가 고등학교를 마친 뒤 휴이트 앤 터틀이라는 곡물도매회사의 경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당시의 그에게 일과 신앙은 삶의 기둥이었다.
1859년 동료인 모리스 클라크와 함께 '클라크 앤 록펠러'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생필품과 음식을 팔아 엄청난 돈을 벌었고, 나중엔 미국에서 생산된 석유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부업 삼아 클리블랜드에 정유소를 세운 것이 록펠러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수물자의 운송이 필요했고 클리블랜드 인근 타이터스빌에서 유정이 발견되자 석유산업이 급성장하게 되었다. 록펠러는 석유운송과 정유사업의 전망을 좋게 보고 사업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그의 전망은 적중해 석유운송 사업에서 큰돈을 벌게 되었고 1870년에는 자본금 100만 달러의 스탠더드오일을 창업하기에 이르렀다.
불황기에 철도와 석유사업자 간의 카르텔을 구성해 운송료와 석유산업의 마진을 조정했고, 이 카르텔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사업자는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전략을 통해 록펠러는 미국 석유시장의 95%를 장악하는 독점자본가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경쟁사를 무너뜨린 록펠러는 독점자본가로서 악명을 드높인다. 그는 자기 회사의 노동운동을 철저히 탄압했으며, 끊임없이 경쟁사들을 몰락시키고 시장을 지배해 나갔다. 1982년 40개의 회사를 트러스트로 묶어 독점의 횡포를 부리는 그에게 대중은 '당대에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주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는 "록펠러가 얼마나 선행을 하든 그 부를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 사회는 이 집요하고 잔혹한 석유 독재자를 결코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결국 록펠러로 인해 미국에 독점금지법이 생기게 되며, 1911년 미국 연방법원은 끝내 스탠더드오일의 해체를 명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이 석유 독점기업은 34개의 회사로 분할됐으며, 오늘날의 엑손, 쉐브론, 모빌, 아모코 같은 석유기업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 지분은 1896년에 4000만 달러 규모였으나 그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1897년에는 2억 달러로 늘어났다. 독점금지법 위반 판결로 회사가 해체된 후에는 주가가 더욱 올라 1913년에는 10억 달러의 재산을 갖게 된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사상 최고의 부자가 된 것이다.
은퇴 후 록펠러는 자선사업에 몰두하게 된다. 자신의 재산 관리를 10년 동안 담당해 온 프레더릭 게이츠 목사의 영향도 있었지만 강철왕 카네기와의 자선사업 경쟁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인류의 복지 증진'이라는 거창한 슬로건과 함께 록펠러 재단을 출범시키는 한편 시카고대학 설립을 위해 6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하고, 그 후에도 3억5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록펠러 의학연구소와 다양한 교육재단의 설립을 위해서도 수많은 기부활동을 펼쳤다.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계산해 볼 때 그는 거의 60억 달러를 사회에 환원하였다.
1920년대 말의 대공황 때에도 록펠러의 진가가 발휘되었다. 미국 정부는 대공황이 닥치자 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후버댐, 금문교를 건립했다. 이때 록펠러는 정부사업에 버금가는 사업을 벌인다. 1928년 착공한 록펠러 센터는 당초 계획보다 훨씬 큰 고층빌딩으로 확대 건축되어 실업 해소에 기여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의 탄생에 대해 국가 간 합의가 이뤄졌을 때 록펠러재단은 뉴욕 시내의 땅을 매입해 UN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무상 기증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선 돈을 쓰지 않았다. 그는 세계 최고의 부자이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수도승처럼 살았다. 술, 담배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파티나 극장에 가는 일도 없었다. 자식들 용돈도 같은 또래 친구보다 적게 주었다. 1937년 그가 97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의 생활은 주변에 사는 다른 농부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열심히 농사일을 하고, 해 떨어지면 바로 잠자리에 들고 일요일은 종일 교회에서 보냈다.
기부의 규모로만 따진다면 현재의 빌 게이츠 재단이 더 클지 몰라도 부자들의 기부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일을 한 것은 100년 전의 록펠러와 카네기다. 그들이 기부의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록펠러가 부만을 쫓았다면 이 악랄한 기업가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변신했다. 54세 된 해에 병을 얻어 2년 동안 와병한 뒤 1937년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자선사업가로 제2의 인생을 살았다.
시카고대학 록펠러 의학연구소, 일반교육이사회, 록펠러 재단 등을 통해 거액의 재산을 희사(喜捨)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따뜻한 시선을 던졌다. 기부정신의 대물림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록펠러의 기부는 당대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외아들 록펠러 2세를 자선사업가로 키우는 데 말년의 열정을 쏟았다. 록펠러 가문을 통해 흐르는 기부의 참뜻은 자발적 사회공헌이다.
록펠러는 "신에게서 돈을 버는 재능을 부여 받았기에 신이 명하는 대로 더 많은 돈을 주위 사람들에게 써야 한다"고 말했다. 록펠러의 그런 약속에는 사람에 대한 따뜻함이 스며 있었다. 록펠러는 보이지 않게 사회사업을 했다. 시카고대학이 설립자 록펠러의 이름을 학교명에 집어넣겠다고 했지만 그는 극구 사양했다. 그는 자신이 기증한 건물에 이름이 새겨지는 것까지도 끝내 거절했다.
록펠러는 자선을 베푸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다. 록펠러는 돈을 벌 때에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사회사업을 하면서 신경쇠약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돈을 달라고 내미는 손은 너무 많은데, 누구에게 어떻게 주어야 할지를 결정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선사업을 하면서도 자신이 지원하는 사회사업들이 자생력을 갖추는 데 가장 신경을 썼다.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해당 단체들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사업 조직이 록펠러의 돈에만 의지하지 않고 실질적인 사회공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지속적으로 기부를 받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록펠러는 한 번에 큰돈을 지원하지 않았다. 종자돈(seed money)을 먼저 지원한 뒤 사업진행 상황을 살펴보면서 제대로 굴러갈 전망이 서야 지원액수를 늘려갔다. 다른 경로를 통해 사업자금을 지원받도록 유도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록펠러 재단은 극빈자에게 직접 돈을 주거나 음식물을 지원하는 봉사활동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프리카에 있는 대학교에 장학금을 주기는 해도 아프리카 난민을 위한 음식물 제공은 하지 않는다.
록펠러 재단의 식량안전사업도 아프리카에 음식물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량이 많은 종자와 토지를 비옥하게 하는 비료를 개발하고 제공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직접 기부도 필요하지만 진정한 자선사업은 빈자와 부자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란 뜻에서이다.
빈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만들어 주는 게 더 좋다는 것이다. 록펠러재단이나 뒤를 이은 많은 자선단체들이 직접 지원보다 교육 사업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록펠러 방식은 실천하기 어려운 길이다. 돈을 그냥 쾌척하는 것과 달리 기업을 경영하듯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방식은 지원받는 단체들로부터 썩 좋은 소리를 듣기도 어렵다. 돈 많은 사람이 짜게 군다는 비난이 나오기도 쉽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돕는 길이라는 것이 록펠러의 기부철학이다. 그의 인생 전반부는 악명 높은 기업인이었으나 그 후반부는 위대한 기부자의 삶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9)] 미국 갑부들의 기부
세계 최고의 부자이자 세계 최고의 기부자인 빌 게이츠
빌 게이츠는 현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개척자이며 세계의 기부 황제다. 그는 1986년 마이크로소프트(MS)가 상장되면서 서른한 살의 나이에 역사상 가장 어린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의 갑부' 1위 자리를 10여 년째 장기집권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또한 <파이낸셜 타임스>가 선정하는 '존경받는 세계의 비즈니스 리더'이며, 300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기부한 세계 최고의 자선가이기도 하다. 그는 카네기가 물꼬를 튼 기부의 전통을 100년 만에 찬란한 기부문화로 승화시킨 새 시대의 기부 영웅이다.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1955년에 출생한 빌 게이츠는 13세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독학으로 깨우쳤다. 하버드 대학을 중퇴하고 19세에 친구인 폴 앨런과 1500달러를 자본으로 MS를 설립했다. 아직 컴퓨터가 상용화되지 않았던 시절, 빌 게이츠는 '모든 책상 위에 컴퓨터를, 모든 가정에 컴퓨터를'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실현해 왔다. 1995년 윈도의 개발로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을 석권했으며 지금 MS의 매출은 연 400억 달러를 넘는다.
이제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사업은 전 인류의 복지 향상이다. 그는 "사회에서 성공을 하고 부를 쌓은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사회에 부를 환원하고 불평등을 개선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제3세계의 빈민 구호와 질병 퇴치에 앞장서고 있다. 빌 게이츠는 매년 저개발 국가 어린이의 교육, 난치병 연구 등 사회공헌 프로그램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돈을 기부하고 있다.
그가 자선사업을 위해 아내와 함께 만든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은 현재 기금이 350억 달러에 달하고, 매년 14억 달러를 각종 연구 등에 기부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최근 그의 재단이 미국 내 소수민족 학생을 위해 기부한 장학금만 18억 달러에 이르며, 아프리카 어린이 말라리아 퇴치 등을 위해서도 32억 달러를 기부했다.
최근 들어 그가 행한 선행 중 가장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결핵 퇴치를 위한 거액의 기금 쾌척이다. 게이츠 재단은 지난 2004년 2월 결핵 백신 연구용으로 8300만 달러를 '에어러스 글로벌 결핵 백신 재단'에 기부했다. 게이츠 재단이 기부한 이 액수는 연간 전 세계 결핵 백신 연구비용의 2배가 넘는다.
빌 게이츠의 자선사업은 개인의 도덕적 책무 수준을 넘어서는 인류를 위한 복지사업이다. 그의 자선사업에는 그의 가족은 물론 그가 경영하는 MS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그는 현재 회사 직원 전체의 자선활동을 촉진시키기 위해 직원들이 돈을 기부하면 그 금액만큼 회사에서도 기부하는 '기빙 매치(Giving Match)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빌 게이츠는 나눔을 문화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기부자다.
그런 빌 게이츠가 2006년 6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발표를 했다.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그는 회사 측을 통해 낸 발표문을 통해 2008년 7월 31일자로 MS의 경영에서 손을 떼고 자신이 세운 자선기관인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 업무에 주력할 뜻을 밝혔다.
그는 발표문에서 "나에게는 힘든 결정이었다"며,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성공으로 나는 엄청난 부를 얻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부를 사회에 돌려줄 큰 책임이 있고, 또 최선의 방식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검소한 생활태도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의 무려 99%를 사회에 내놓고 세 자녀에게는 각각 1000만 달러씩만 상속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가 과거의 기부자들과 다른 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다가 인생의 말년에 대오각성하여 자선사업에 나선 것이 아니라 젊어서부터 거액 기부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이제 세계의 기부역사를 새로 쓰려고 한다. 그의 능력과 철학으로 자선사업에 전념한다면 세계의 기부문화를 바꿔놓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의 발표가 있자마자 그의 아버지뻘 친구인 워렌 버핏이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빌 게이츠가 믿음이 가고 그가 잘 할 것 같아서"라는 이유만으로 370억 달러에 달하는 거금을 쾌척한 것이 그 증거다.
세계 최고 부자에게 재산 맡긴 세계 2위 부자 워렌 버핏
2006년 6월 세계 2위의 부자 워렌 버핏은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의 재단에 370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재산을 기부함으로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자신의 작고한 부인과 자식들 명의의 재단이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큰 돈을 빌 게이츠가 믿음이 가고, 자신보다 운영을 잘 할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친구라고는 하지만 남의 재단에 선뜻 쾌척한 것이다. 참으로 '투자의 귀재'요 '오마하의 현인'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불법상속으로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기업 관련 비리로 세상의 지탄을 받는 입장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버핏의 선행은 더욱 빛을 발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은 점은 부자들의 기부를 색안경 끼고 보는 습관에 젖어 있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들고도 남았다.
그 기부로 버핏은 찬란하게 빛나는 미국의 기부전통에 한 페이지를 추가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셈이다. 미국의 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나눔의 전통은 미국과 미국의 기업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마저도 그들을 마냥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그러한 전통은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천당 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힘들다'는 부자를 존경받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버핏이 자식들에게로의 상속은 물론 자신의 이름을 붙인 재단을 만들지도 않고 별다른 요구조건 없이 단지 기부금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것이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남의 재단에 거액을 희사한 것은 그 기부의 순수성을 더욱 숭고하게 하며 기부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전환점이 되었다. 기부를 받는 빌 게이츠 또한 자신의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자선사업에 전념하겠다는 선언을 이미 한 바 있어 새로운 기부문화의 창달에 빛을 더하였다.
그런 살신성인의 기부를 할 수 있는 버핏은 참으로 크게 깨우친 사람이 아닐 수 없으며 진정으로 잘 사는 길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자식에게 너무 많은 돈을 물려주는 것은 사회를 위해서도, 자식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말하는 버핏이니 능히 그럴 만도 하다. 그는 "내 자식들이 내가 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물려받을 수는 없다"며 "부가 왕조적으로 세습되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현인이 아니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이다. 이런 아버지의 뜻을 일찍부터 이해했는지 그의 자식들도 이미 자신들의 자선재단을 각기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흔히들 '이 세상에 쓰고 간 만큼이 자기 돈'이라고들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도 워렌 버핏은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고, 돈쓰기의 모범을 보인 사람이다. 미국이 밉다가도 진정으로 미워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기부문화의 전통에 있다.
또 이러한 전통이 부자를 존경하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오고 있는 것이다. 버핏의 기부가 눈에 띄는 또 다른 이유는 재산의 상당 부분을 살아 있을 때 기부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그의 기부를 계기로 '기부 활동을 하려면 살아 있을 때 하자'는 움직임이 미국 부자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고 한다. 굳이 세계적으로 소문난 부자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생전 기부'가 뚜렷한 흐름이 되고 있다고 한다. 기부문화의 흐름을 바꾼 큰 기여가 아닐 수 없다.
1930년 대공황 때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주식 거래상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고 11살 때 처음 주식투자를 시작한 워렌 버핏은 가치투자의 선구자이며 그것으로 엄청난 부의 성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1958년 고향에서 3만1500달러를 주고 산 낡은 집에서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으며, 맥도날드 햄버거와 코카콜라를 즐기고 오래된 중고 자동차를 직접 몰고 다니는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한 그가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세상을 위해 내놓은 것이다. 그는 진정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러한 버핏의 마지막 투자 역시 엄청난 가치를 발휘할 것임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미국과 UN을 놀라게 한 기부자 테드 터너
CNN 방송의 창업자 테드 터너는 그의 독특한 행적으로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천재적인 아이디어맨이며 창의적인 사업가이자 과감한 기부자로서, 열정과 도전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인도주의자이며 자연생태 보호를 주장하는 환경주의자이다. 또한 그는 여성의 권리를 외치는 인권주의자이며 핵 군축을 주장하고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미국 정부가 내지 않는 거액의 UN 분담금 10억 달러를 쾌척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는 테드 터너는 UN 외에도 수없이 많은 자선사업과 비영리단체들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개인 재산의 반 이상을 보건, 환경보호, 야생생물 보호, 인권 증진, 인구 증가 관련 문제 등을 다루는 단체들에 투자했다.
그가 1990년에 설립한 터너 재단(Turner Foundation)은 핵무기 통제, 10대의 임신 예방, 멸종 위기에 놓여 있는 미국 흰두루미 보호, 러시아의 환경정화 운동 등에 490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1994년에도 그는 2억 달러를 자선단체에 기부한 바 있다.
미국 내에 200만 에이커에 달하는 농경지를 소유하고 있는 최고의 땅 부자이기도 한 터너는 그 땅에서 1997년부터 '터너 멸종위기종 보호기금'을 통해 토착식물과 새, 물고기 및 포유동물의 보전 등 생태계 회복 운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99년에는 자국 정부로부터 공격받고 있던 세르비아 남부 코소보의 피난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10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고, 2000년에는 4400만 달러를 574개의 환경단체 및 인구조절단체에 기부하였다.
또한 2000년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세계의 안전을 위한 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면담 후 터너는 대량살상무기의 위험을 경감시키고자 하는 NGO 단체인 '핵 위협 이니셔티브(Nuclear Threat Initiative)'에 2억500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미국 정부도 주저했던 유고슬라비아의 원전 해체 및 러시아로의 이전 비용으로 500만 달러를 내놓아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항상 지구 전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을 남겨주는 것보다 더 위대한 유산 승계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기부를 통한 간접지원 외에 그는 다양한 단체에 관계하며 자신이 직접 활동에 나서기도 한다. 그는 UN재단의 이사장이며 그 외에 마틴 루터 킹 비폭력 혁신센터, 그레이터 옐로우스톤 콜리션, 스미소니언 아메리칸 인디언 박물관을 위한 국제기부자 협회 등의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원자력시대 평화재단 자문단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는 또 "돈이 많아도 어디에 써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의미가 없다"며 부자들의 기부를 독려하기도 한다. 그가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을 설득해 위대한 기부자로 변신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테드 터너는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던 빌 게이츠에게 "너무 많은 돈을 은행에 예금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네. 그 돈으로 남을 돕는다면 인생이 훨씬 풍요로워질 텐데…"라고 충고했고,. 빌 게이츠는 이 말에 감동을 받아 자선사업가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세계적인 부호이지만 터너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이다. 그는 1938년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났다. 간판광고업에 종사하던 그의 아버지는 사업부진으로 그가 25세 되던 해에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후 터너는 자신이 사업에 뛰어들어 "폭탄이 아닌, 아이디어로 세상을 정복하겠다"며 성공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한다. 1975년에 터너는 최초로 통신위성을 이용하여 전국 유선 텔레비전 방송국인 TBS를 세우고 1976년에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프로야구팀을, 1977년에는 애틀랜타 호크스 농구팀을 매입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세계최초의 뉴스 전문 케이블 방송사인 CNN을 설립하고 1986년에는 MGM/UA 연예회사를 인수한다. 1988년에는 시청률이 높은 혁신적인 유선 텔레비전 네트워크인 TNT(Turner Network Television)를 창설하였다. 그 후 TBS는 타임 워너와 합병하였고, 타임 워너는 다시 AOL과 합병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터너는 그는 모든 사업체를 유기적인 공생관계로 묶어 발전시켜 왔다.
그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명예를 얻었지만 그의 명성은 나눔의 실천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자선에 대한 그의 확고한 철학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팝콘을 먹는 것과 유사하다. 팝콘으로 배를 채울 수는 있지만 만족을 느끼기는 어렵다.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 필요가 있다"는 그의 말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그는 몇 해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부자일수록 사회에 대한 책임을 의식해야 하며 한국의 부자들이 그렇지 못해 비난을 받고 있다면 불행한 일"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는 미국의 찬란한 기부역사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빛을 더한 인물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10)] 희망을 주는 국내 사례들
미국과 같은 기부문화 형성의 가능성이 우리에게도 없는 것은 아니다. 선조들의 희생정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계승하는 기업가 노블레스와 시민 노블레스가 서서히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희망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 기부문화의 활로를 모색해본다.
기부도 벤처 경영처럼 하는 정문술
정문술(鄭文述)의 인생은 유난히 기복이 심하다. 젊은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에서 근무를 시작해 상당한 고위직에 올랐던 그는 신군부의 쿠데타로 강제퇴직을 당했다. 45세의 나이에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 창업을 했으나 사기를 당하고 사업에 실패해 자살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재기해서 사업을 키웠으며,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나스닥 상장까지 이루었다. 그리고는 나눔으로 눈을 돌려 회사의 경영권을 가족이 아닌 종업원들에게 물려주고, 이제는 재산의 사회환원에 나서고 있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델이다.
정문술은 193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1957년 익산 남성고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1961년 육군 하사로 제대한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중앙정보부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중간에 대학을 다닌 기간 외에는 계속 중앙정보부에 재직하여 3급 공무원의 위치에까지 오른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의 위세에 비추어 보면 소위 '출세'를 한 것인데, 그의 시련은 1980년대와 함께 시작된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퇴직을 당한 것이다. 한 직장에 20년 가까이 근무하다 40대 중반에 갑자기 쫓겨난 사람이 느끼는 좌절감은 충격에 가깝다고 한다. 그것도 직장이 권력기관이었다면 충격은 배가 될 것이다. 게다가 그 충격은 퇴직 직후 잘못 인수한 빚더미 회사의 실패로 더욱 커진다.
그러나 정문술은 오히려 "창업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해 45세의 늦은 나이에 반도체 생산설비 업체인 미래산업을 설립하여 자신의 미래에 승부수를 띄운다. 그는 이때 다른 제품을 모방하고 나중에 기술을 배울 것이 아니라, 먼저 기술을 확보한 뒤에 고품질의 제품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일본 반도체 회사에서 은퇴한 기술자를 초청해 파격적인 임금을 지급하며 기술을 습득해 반도체 조립장비인 '리드프레임 매거진'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 제품은 1년 만에 국내시장을 독차지하는 성과를 올린다. 그 다음에 그가 도전한 것은 반도체 웨이퍼(집적회로를 만들 때 쓰는 직경 5~10cm의 실리콘 단결정의 얇은 판)를 자동으로 검사해 주는 장치였다. 이 제품의 개발을 위해 그는 그때까지 벌어 놓은 3억 원을 쏟아 붓고 10억 원을 차입했는데도 자금이 부족해 집안의 패물 등을 처분하고 친척들의 돈까지 빌려 썼다.
우여곡절 끝에 기술개발에는 성공했으나 제품의 속도 문제로 인해 상품화에는 실패한다. 그 결과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고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그는 가족 동반자살을 염두에 두고 약을 사 모으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죽을 수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상품화에는 실패했지만 기술은 남아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 기술을 가지고 팔릴 만한 다른 제품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개발한 상품이 '테스트용 핸들러'였다. 이 제품이 국내시장을 석권하면서 정문술은 재기하게 된다. 그는 "그때 이후 사업의 결정적인 무기는 기술이라는 점을 늘 잊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이후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미래산업은 한국 반도체설비 업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부상하고 우량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거부가 되었다.
그는 철저하게 실용주의 경영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래산업의 핵심 엔지니어는 대다수가 고졸 출신이며, 회사가 아무리 커져도 사장 위에 회장 자리를 두지 않아 자신의 직함은 항상 사장에 머물러 있었다. 비용절감을 위해 비서를 두지 않은 탓에 미국 비자가 만료된 줄도 모르고 공항에 나갔다가 되돌아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원복지에는 아끼지 않고 투자를 했다.
그는 창업 초창기에 경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좌충우돌할 때 우연히 집어든 아들의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본 내용대로 회사를 운영한다고 한다. 즉 "더불어 살아야 한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성실해야 한다,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식의 뻔하고 따분한 경구대로 경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의 반대로 해야 성공을 한다는 세상에서 그런 '공자님 말씀'을 따르는 그의 경영방식을 두고 '거꾸로 경영'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융통성 없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한 그는 원칙에 충실한 경영자였다.
정문술은 그렇게 키운 분신 같은 회사의 경영권을 "착한 기업을 만들어 달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자식이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늘 자식들에게 '유산은 독약'이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어려움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이 행복인데 자식들에게 유산을 많이 남겨주는 것은 자식들의 행복권을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다.
회사를 떠난 그는 한동안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한 '마지막 벤처 프로젝트'를 모색한 끝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300억 원을 쾌척했다. 평소 인탐(人貪)이 많은 경영자답게 그는 바이오테크 분야의 고급 인재를 키우는 사업에 써달라며 거액을 기부한 것이다. 그는 돈만 내놓은 것이 아니라 KAIST와 과학기술부에 첨단학과 신설과 교수, 시설, 기자재의 유지 및 관리에 필요한 예산지원을 요청했다. 기부도 기업 경영하듯 용의주도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 KAIST는 '바이오시스템학과'를 신설하고 그의 기부금을 재원으로 바이오테크 연구동을 신축하게 되었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고 설파한 앤드루 카네기에게 감명을 받았다는 그는 카네기의 교훈을 따르면서 "죽음이 목전에 닥쳐서야 떨리는 손으로 뭉칫돈을 내놓은 일은 정말 하기 싫다"는 자신의 지론도 동시에 실천한 셈이다. 그는 KAIST에서 열린 '정문술 빌딩'의 기공식에는 물론 준공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정문술 빌딩'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도 본인이 하도 펄쩍 뛰어 학교 측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고 한다. '도덕경영주의자'다운 행동이다.
정문술의 치밀하고도 구체적인 기부방식은 우리나라의 기부문화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좌절에서 나눔으로 발돋움한 그는 우리 사회가 지금 필요로 하고, 따라 해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델이다.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한국의 록펠러, 관정 이종환
관정(冠廷) 이종환(李鍾煥) 교육재단은 출범 때부터 우리나라의 사회사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이유는 재단의 출연규모가 그때까지 존재하던 모든 재단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2000년 출범할 때는 10억 원 규모였지만 2003년에 3000억 원, 2004년에는 4000억 원으로 늘어나면서 순식간에 우리나라 최대의 재단이 된 것이다.
게다가 그 출연자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회장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이 더욱 컸다. 현재 삼영화학그룹의 매출액은 연간 4000억 원 규모다. 그는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의 1년 매출액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장학재단에 쾌척한 것이다. 기업 규모에 비해 유명무실한 장학재단을 운영해 오던 재벌들이 민망해 할 것 같다.
그의 쾌거는 한 세기 전 미국 땅에서 카네기나 록펠러가 자선재단을 세웠을 때의 파장에 견줄 만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 카네기 재단이나 록펠러 재단의 출범이 미국 기부문화의 발달에 시동을 거는 신호탄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관정의 재단도 그런 역할을 하리라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재단이 장학사업 규모로는 국내 최고라고 들었습니다. 누구나 최대나 최고의 기록을 오래 유지하고 싶겠지만, 저는 이 기록이 빨리 깨지길 바랍니다"라며 국내에 장학금 기부를 비롯한 기부사업이 좀 더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종환 회장은 그런 믿음을 갖게 한다.
이 회장은 1959년 서울 영등포구에 삼영화학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50년 가까이 국내 석유합성수지 가공제품산업을 선도하면서 현재의 삼영화학그룹을 키워낸 기업인이다. 삼영은 초박막 필름과 포장용지, 합성지 등을 생산한다. 그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삼영화학의 중국 진출을 진두지휘하는 등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회장은 "과거의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었고 지금의 중국이 세계의 시장이라면 미래의 중국은 세계의 심장이 될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진취적이며 안목과 식견이 있는 기업인이다.
그는 평생 '전쟁하듯' 기업을 일구고 재산을 모으는 데 진력했지만 일흔 살이 넘으면서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식들에겐 자립을 위한 최소한의 것만 남겨 주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과 마찰도 있었다. 이 회장은 2000년 부인으로부터 이혼 청구 및 재산 분할 소송을 당하기도 했고, 사재 출연에 반대하는 가족들과 불협화음을 빚기도 했다. 지병으로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둘째 아들이 마음에 걸려 한때는 최고의 자선병원 설립을 검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결국 장학재단으로 결론이 났다.
이종환 회장은 '인재와 기술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기술 없이는 경쟁력도 없으므로 이공계 인재를 잘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은 매년 150억 원을 장학사업에 투입하고 있다. 국내 장학생 1000여 명과 국외유학 장학생 1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고, 장학지원 대상자 중 70% 이상을 이공계 학생들에게 집중하고 있다. 국내에선 최대 규모이고,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히는 규모다.
이 회장은 빠른 시일 안에 개인자산을 더 투입해 재단의 기금을 6000억 원 안팎으로 늘릴 생각이다. 그 정도 규모는 되어야 오래 지속하는 장학재단으로 자리를 잡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지금도 이면지를 사용하라며 직원들을 닦달하고 점심시간이면 직원들과 함께 자장면을 즐겨 먹어 '구두쇠' 소리를 듣는 이 회장이지만 사람 키우는 일에는 이렇듯 배포가 크다.
그는 장학재단의 운영에 대단히 엄격하다. 장학생 선발기준도 객관적이다. 저명한 교수진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전권을 갖고 영재급 인재들만 선발한다. 이 회장 자신도 장학지원 대상 학생 선발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회장은 장학금과 관련된 청탁이 들어오면 재단이 아닌 개인 비용으로 처리할 정도로 철저하고 투명하게 재단을 관리하고 있다.
그는 기부문화의 정착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우리도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한데 기부가 좀 더 활성화되어야죠. 기부문화는 사회안정에도 도움이 됩니다. 아쉬운 건 행정적 지원입니다. 규제가 너무 많아요. 기부에 대한 세제혜택도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 사립대학들이 오늘날 크게 발전한 까닭도 기부문화 활성화와 정부의 행정적 지원이 있어서입니다"라고 주장하는 이 회장은 주변의 평가처럼 분명 한국의 록펠러다.
그의 소망처럼 관정재단이 지원한 인재들 가운데서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이 회장의 뒤를 잇는 제2, 제3의 재단들이 수없이 등장할 날을 꿈꿔 본다.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천사, 김군자 할머니
우리 사회가 김군자(金君子) 할머니께 해드린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할머니의 것을 빼앗기만 했을 뿐이다. 할머니께서 열세 살에 부모를 잃고 끼니를 잇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할머니를 돕지 못했고, 할머니의 일곱 살짜리 어리디 어린 동생이 남의집살이를 갈 때에도 수수방관했다. 할머니께서 나이 열일곱에 일본 놈들에게 정신대로 끌려가실 때에도 우리는 구경만 하고 있었고. 스무 살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이 땅에 돌아오셨을 때에도 우리는 할머니를 보살피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 사회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뿐이다. 그런 할머니께서 우리를 원망하기는커녕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고 있다. 할머니는 천사다.
강원도 평창군에서 딸만 셋인 집의 맏딸로 태어난 김군자 할머니는 10살에 아버지를 잃고 13살에 어머니마저 잃었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 어린 동생들을 남의집살이로 보내고 자신은 이모 집에서 16살 때까지 얹혀 살다가 강원도 철원의 어느 집에 수양딸로 들어갔다.
그 집 아버지는 순사였는데, 할머니가 열일곱 살 되던 1942년 3월에 "돈 벌러 가라"며 웬 30대쯤 되는 한국 남자에게 할머니를 딸려 보냈다. 그렇게 끌려간 곳이 바로 중국 지린(吉林)성 훈춘(琿春)이었다. 그곳 일대에서 지긋지긋한 위안부 생활을 3년이나 하던 할머니는 해방이 되자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귀국한 뒤에도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이 집 저 집 떠돌며 가정부나 술집 생활을 하면서 힘들게 지냈다. 1996년 매스컴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수소문한 끝에 1998년 3월 나눔의 집에 입주할 수 있었다.
그런 할머니께서 2000년 8월 아름다운재단이 창립할 때 "배우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데 집안환경이 어려워 그럴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며 거금 5000만 원을 기부하셨고, 평소에 학교에 다니지 못한 것이 한이었으니 그런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는 뜻을 밝혔다. 할머니의 5000만 원은 정부배상금 3150만 원에 매달 정부에서 지원받은 돈을 푼푼이 모은 것이었다. 할머니가 입고 싶은 옷, 먹고 싶은 음식을 마다하고 정성들여 모은 돈인 것이다.
그렇게 조성된 '김군자 할머니 기금'은 보육소를 퇴소하는 18세 이상 아이들의 대학 등록금으로 사용되었다. 대학에 합격을 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꿈을 접어야 했던 아이들이 할머니의 도움으로 화가, 디자이너, 엔지니어로의 힘찬 첫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할머니의 도움을 받은 아이들이 "고마운 할머니께"로 시작하는 감동적인 편지를 보내 할머니를 위로한다고 한다.
그런 할머니께서 올해 또 아름다운재단에 5000만 원을 기부하였다. 이번에 기부한 돈은 할머니가 6년 동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받은 월 85만 원의 생활안정지원금을 아껴 모은 것이라고 한다. 김 할머니는 올해 3월에도 나눔의 집이 추진 중인 전문 요양시설 건립비로 1000만 원을 내놓은 적이 있다. 할머니는 이번 돈은 고아로 자라는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쓰이기를 원했다. 자신이 고아로 자랐기 때문에 부모 없이 큰다는 것의 아픔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 할머니는 이번에 기부를 하면서 "2000년 기부금으로 혜택을 받은 아이들이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가끔 찾아온다"면서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할머니처럼 남을 돕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요즘 건강이 많이 나빠지신 할머니께서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전 재산을 쾌척한 것이다.
할머니의 5000만 원은 다른 사람들의 5000억 원보다 큰돈이다. 할머니의 기부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첫 번째 메시지는 기부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못 가진 자'다. 평생 모든 것을 빼앗기기만 한 할머니가 기부를 하는데 기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말이다. 할머니의 기부는 '세상에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한 사례이다.
김 할머니의 두 번째 메시지는 '오블리주는 노블레스의 책무가 아니라 오블리주를 실천하면 누구라도 노블레스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노블레스 정도가 아니라 천사다. 할머니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희망'이다. 김 할머니는 우리에게 어떤 절망도 헤쳐나갈 수 있는 희망을 선물한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끝)] 우리의 기대와 과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는 '귀족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기와 솔선수범'에서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로 변해 왔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오늘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가진 자의 나눔을 뜻하는 것이며, 그것은 부의 사회 환원, 즉 기부를 통해서 실천될 수 있다.
기부의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카네기를 시발점으로 해서 록펠러, 포드 같은 기업인들이 기부를 통해 부의 사회환원을 지속적으로 행해 오고 있으며,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등에 의해 면면히 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과거에 존재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나눔의 철학으로 승화되어 계승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라거나 가족이기주의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우리 사회의 삶의 질 양극화 현상은 너무나 심화되고 있고 기부문화의 토양은 척박하기만 하다.
이제 우리도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안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기부는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나 정부의 역할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의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한다. 또 자선적 기부는 사회의 균형발전을 가능하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한다.
우리의 기부 현실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개인의 기부보다 기업의 기부가 많고, 기업의 기부도 준조세적 성격의 비자발적 기부라는 점이 자주 지적되고 있다. 특히 연말연시나 재해가 발생할 때에는 사방에서 무언의 기부 압력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기부를 하는 기업들도 기부를 사회공헌의 일환이라기보다는 면피나 보신을 위한 방책쯤으로 여겨, 기부 자체보다는 그것의 홍보활동에 더 신경을 써 왔다.
게다가 우리 경영자들의 기부는 아직도 대부분 기업의 자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처럼 개인의 재산을 자선사업에 쾌척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한 우리 사회의 개인 기부는 여전히 일부 계층에 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일회성이고 충동적인 기부에 그치고 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 건전한 기부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의 기부를 기업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일회성 기부에서 정기 기부로, 비자발적 기부에서 자발적 기부로, 다액 소수에서 소액 다수로 바꿀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건전한 기부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우선 가진 자들의 모범적 기부가 많아져야 한다. 사회지도층의 모범적인 기부행위는 일반 시민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 이 땅에 소액 다수의 기부문화를 뿌리내리게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모범은 같은 계층의 인사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조지 소로스의 거액 기부는 테드 터너의 기부 인생에 영향을 미쳤고, 테드 터너는 빌 게이츠에게, 빌 게이츠는 워렌 버핏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경쟁적으로 기부 문화를 정착시켰다.
이제 우리에게도 위대한 기부자의 등장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모범을 보이는 인물들이 필요하며, 우리 사회는 그런 이들을 영웅으로 대접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오블리주를 다하는 '가진 자'를 노블레스로 대우해야 마땅한 세상이다.
두 번째는 기부에 대한 교육이 가정과 학교 및 직장에서 상시로 이뤄져야 한다. '자선은 가정에서 시작된다'는 외국 속담이 있지만, 이제 우리도 가정에서 기부하고 봉사하는 교육을 해야 할 때다. 선행을 베푸는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선을 베풀게 된다. 학교와 직장에서도 그러한 교육과 관행이 정착되어야만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부문화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녹아들게 해야 한다.
세 번째는 기부를 장려할 수 있는 여건과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특히 세제상의 공제범위와 관련한 조세제도와 비영리 조직 등에 의한 모금행위를 감독하는 제도가 보다 성숙한 수준에서 마련될 필요가 있다. 기부자의 측면에서는 우선 기부자에 대한 세제혜택의 폭이 커져야 한다.
최근 정부는 다행스럽게도 개인 기부금에 대한 소득세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 개정안에 의하면 개인이 사회복지시설과 소년소녀가장 등 소외계층에 제공하는 기부금에 대한 소득공제 혜택이 '연간 소득금액의 5% 한도'에서 '기부금 전액'으로 확대된다. 또한 학술, 종교, 문화 등 공익단체에 기부하는 금액에 대한 소득공제 한도도 소득금액의 5%에서 10%로 확대된다.
이는 우리나라 비영리단체의 재원확보 방안에 획기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즉 민간부문에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50%, 일본은 25%까지 소득공제를 받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소득공제 혜택은 더 확대되어야 한다.
기부를 받는 쪽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의 정비도 필요하다. 최근 정부가 기부금품모집규제법 시행령 일부를 개정하여 기부금품 모집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하고 모집비용 충당비율을 15%까지 확대하기로 한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그동안 허가제로 시행됨에 따라 특정 단체 또는 특정 목적의 기부금 모금만이 가능해 특혜 논란이 계속돼 왔는데, 등록제로 바뀜에 따라 시민사회단체들의 기부금품 모금활동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기부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기부와 관련한 규제를 철폐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네 번째는 기부의 대상이 되는 비영리 조직들의 투명성과 신뢰성, 그리고 기부금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이 강화되어야 한다. 그동안 기부의 대상이 되는 비영리기관들의 투명성 결여와 경영역량의 부족은 기부자들의 신뢰를 확보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였고, 그것이 일반 시민들의 기부 참여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기부자들은 자신이 기부한 돈이 꼭 필요한 곳에 쓰였는지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 사용되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따라서 자선적 기부의 대상이 되는 비영리 조직들은 지배구조의 투명성과 경영능력 및 신뢰성 확보를 위해 항시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일반 시민들의 적극적인 기부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다양하고 혁신적인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비영리 단체들은 기부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부상품 개발과 기부자 지향적인 서비스의 체계적인 구축을 위해 조직의 운영에 시급히 마케팅 개념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선진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마케팅은 기업에서만 활용되는 경영기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모든 분야에서 무한경쟁 체제가 형성되면서 비영리조직에서도 경쟁력 확보를 위해 마케팅 개념이 활발하게 도입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 건강한 기부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안들을 통해 자선적 기부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참여를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기부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우리도 이제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을 조금씩 소외된 이웃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전한 기부문화의 정착이 시급하다. 기부문화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시대정신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도록 하기 위해 사회지도층과 시민들은 물론 기부를 필요로 하는 비영리단체와 언론 및 정부도 동참하는 범국민적 캠페인이 필요한 시점이다.